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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타임!

실패하는 게 나은 시간을 위해

by 좋으니


너 곧 불그스레해지겠구나

너는 서늘한 바람을 기다렸구나

네 뺨을 데울 바람이 오고 있구나

푸름이 더 예쁜 줄 알았더니

붉어진 네가 더 예쁘구나

부끄러워 너 곧 숨겠구나


야근하고 퇴근하는 길. 푸릇푸릇 불가사리 같은 잎이 가로등 조명에 환히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끄트머리를 보니 아주 살짝 붉어지려는 것이 보였다. 눈을 멈추게 하더니 내 발까지 멈추게 한 단풍잎. 회사에서 쓰던 커피 그라인더와 빈 유리병이 담긴 종이가방을 팔에 걸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생각나는 말을 옮겨적었다.


아직 익지 않은 단풍잎을 보고 그냥 생각난 단어들. 불그스레, 바람, 뺨, 푸름, 예쁨, 부끄럼, 숨음…. 붉으스레라고 쓰고 싶은 불그스레. 이 계단을 몇 번만 더 오르면 곧 붉어지겠지. 내가 모르는 새 어느 틈에. 대낮엔 부끄러우니 모두 잠든 밤에 단장하려나. 가로등 조명에 빛나는 푸름을 담아두었다.


계절 변화로 인해 식물의 잎이 붉은빛이나 누런빛으로 변하는 현상, 또는 그렇게 변한 잎을 뜻하는 한자어. 단풍의 사전적 의미이다. 나는 단풍이 봄날의 벚꽃처럼 금세 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간이 하도 빨리 지나가서 단풍도 시간 쫓아 빨리 지는 줄 알았다. 1, 2주 만에 폈다가 지는 벚꽃과 달리 단풍은 좀 더 오래 간다.


“바쁘다고 봄나들이도 함께 가지 못할 인생이라면 실패하는 게 낫다.”

며칠 전 강의에서 들은 정지우 작가님 글이 생각났다. 벚꽃도, 단풍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예전의 나는 실패하지 못해 실패했다. 바쁜 것도 없는데 참 바쁘게 살았다. 단풍이 나를 피해 숨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마음이 수시로 바빴다. 촌스럽게 꽃구경, 단풍 구경은 무슨, 이라고 생각했다.


실패한 나를 위로할 내가 없어서 아등바등 살았다. 작고 사소한 일 하나도 대충하지 못했다. 나는 칭찬받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를 시키면 두 개를 준비하고, 남들은 알지도 못하는 디테일에 목숨 거는 사람. 그럴수록 일은 쌓였고 나는 소진되었다. 나의 소진으로 누군가가 만족한다는 것을 연료 삼아 다시 소진될 준비가 된 사람. 그래서 나는 성공했나, 아니. 그냥 내게 주어진 양만큼만 주어졌다.


동생이 그러니 너라도. 이 말을 듣고 자란 나는 실패가 아팠다. 눈곱만한 실패도 마음이 너무 저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게 실패라고 해봤자 뭐 그리 대단한 일이었겠나. 그렇게 아등바등해서 또 얼마나 성공했겠나. 돌아보니 진짜 별것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 훅훅 들어오는 우울감에 내가 걷는 거리, 나를 사랑하는 가족, 때때로 하하 웃을만한 사소한 행복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예민하고 까칠해졌으며 웬만해선 설레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돈 아깝게 꽃 선물은 왜 하는 거야 했던 사람이 나다. 아빠의 꽃 선물에 돈으로 주지라고 했던 엄마처럼 어느새 나도 무채색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보고 설레고, 길가에 홀로 핀 꽃 한 송이와 오래 눈을 맞추는 사람이 되었다. 딱 맞춰 도착한 지하철에 괜히 기분 좋고, 비 소식에 챙긴 우산을 온종일 펼 일 없어도 괜히 챙겼어 대신 괜히 든든한 사람. 맛있는 원두를 사면 원두를 다 내려 먹을 동안 내내 행복해하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도 어떡하든 감사를 찾아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었다.


아직 익지 않은 푸른 단풍을 보고 멈춰 서서 계절의 변화를 내 시간 안으로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하철 막차가 끊겨 걸어가야 한대도 성공한 삶이 아닐까. 성공이 별건가. 오늘 하루, 한 줄 글 쓸 수 있는 마음만 있어도 성공인 거지. 매일을 피크타임으로 살아야 한다면 누구든 너무 애처롭다. 실패하는 게 나은 시간을 위해 잠시 브레이크타임! 힘내서 다시 영업해야 하니까.


한 줄 요약 : 휴식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업주는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근로기준법 제110조 제1호)
진짜가 나타났다! 이 글 보고 우리과 대표님이 보여준 사진! :) 혼자 보기 아까워 보내달라고 해서 공유합니다! 예쁜 사람 눈에만 눈에 띄나봐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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