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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과인간 May 20. 2017

속하는 삶과 발전하는 삶

  늘 어디엔가 '속하기' 위해 살아왔다. 초중고를 다닐 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했고, 대학에 가서는 좋은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떤 곳에 속해있는지가 그 안에서 뭘 하는지보다 중요한 거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입학과 입사를 '출발'이 아닌 '목적'으로 여겼던 나는 원하는 곳에 들어오고 나면 매너리즘에 빠져 무엇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않았다. 학교도 대충 다녔고, 회사 일도 큰 열정을 가지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시작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위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이미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받는 학점은 대학 간판에 비하면 훨씬 덜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니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다들 학점 관리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적어도 내가 다니는 시절에는). 오히려 토익 점수나 자격증, 혹은 대외 활동 등에 더 큰 의미를 두고 그것들을 '취득했다'. 취득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세상. 자신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시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언가를 '따내고' '얻고' '속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사한 곳은 로펌의 행정직이었다. 내가 생각해서 할 수 있는 일은(내 의견대로 해도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고 기계처럼 주어진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하는 게 전부였다. 업무적인 성취와 발전이 있었을 리 없다. 첫 직장조차 내가 살아왔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2년 3개월을 그런 곳에서 지내다 보니, 그런 업무에 너무나도 익숙해졌다. 


  어떤 곳에 속해있지 않을 때는 그곳에 속하기 위해 나를 업그레이드시켰던 것 같다. 번역을 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영어책을 읽고 학원도 다녔다. 그러고 나서 막상 번역 회사에 들어가고 나니 더 이상 번역 공부를 하지 않고 주어진 일만 한다. 그러니 또 제자리걸음. 출판사에 들어오고 싶어서 준비해서 입사했고, 그러고 나니 또다시 주어진 일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번역을 시작하고, 출판사에 입사하고 나자 깨닫지 못하는 새, 모든 게 다 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매너리즘에 젖어 하루를 보내도 된다고,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 이런 바보가 따로 없다. 이제부터가 진짜인데. 이제부터가 내가 해야 할 부분이고 만들어나가야 하고 성과를 내야 하고 발전해야 하는 부분인 건데. 


  얻고 나면 미션이 컴플리트 되는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어느새 나는 주어진 일만 처리하는 기계가 되었고, 직원으로서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 닥쳐오자 당황했다. 물론, 평생 이러한 행정업무만 해낼 거라면 상관없다. 공무원이나, 교직원이라면 직장도 안정적이고 잘릴 일도 없으니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속한 세계는 실력별로 격차가 확실한 곳이라, 살아남으려면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곳이다. 


  바보같이 살아왔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노력했던 건 입사와 동시에 끝이다. 그 이후에는 스스로 발전하지 않으면 내 밥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갈고닦아야 한다. 회사에 다닌다고, 번역을 시작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언제든 나는 이곳에서 밀려날 수 있으며,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최근 번역도 기준이 까다로워졌고, 회사도 계약기간 만료가 다가온다. 그래서 매일같이 끔찍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 번역일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면, 회사에서 잘릴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면 또 간과했을 부분이겠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거, 이 분야에서 '잘 해내기 위해' 나를 발전시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모르는 것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 나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이게 내 인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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