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당일 - 0일 차

이별의 기록

by 고양이과인간

이별을 생각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이별을 말하러 나갈 때 확신이 없었다. 만약 당신이 정말 미안하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면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당신에 대한 감정을 모두 놓지 못했던 상태였기에 이별 카드와 랜덤 카드를 동시에 챙겨서 나갔다. 이별을 원점으로 돌릴 수 있던 랜덤한 마음. 하지만 역시나, 랜덤 카드를 쓸 상황은 오지 않았다.


당신을 만나자마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당신은 익숙하게 나에게 휴지를 건넸다. 하지만 거짓말 같게도, 그동안 당신을 만나며 괴로웠던 점들을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내 마음은 냉정을 찾았고 눈물은 사라졌다.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힘들다고 말했을 때, 당신이 받아들일 만큼만 말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아무런 가감 없이 나의 솔직한 마음을 말하자 역시나 당신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화의 양상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갔다.


- 이렇게, 저렇게 힘든 점이 정말 많았어요.

- 나는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힘들었다니, 그동안 내 노력이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나는 앞으로도 노력하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힘들 수 있어요. 피해자인 당신이 선택해야겠죠. 어떡할래요?

- 그렇다면 그만할까요?

- 그래요.


당신은 늘 나의 예상을 뒤엎는 사람이었는데, 이별은 예상했던 시나리오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다. 그토록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서 괴로웠던 나. 그런 내가 마침내 내가 당신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당신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드라마도 아닌데 헤어지고 나자 비가 내렸다. 비련의 여주인공인 척하고 싶어서 우산을 사지 않았다. 내 마음은 산산조각 났는데 이 세상은 아무런 오차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혼자 있는 것보다는 사람과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누군가를 찾았다.


평소와 같은 가벼운 술자리가 이어졌다. 같이 농담하며 웃고 즐기던 자리였는데 어쩐지 견딜 수 없어졌다. 미안한데 몸이 안 좋다고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혼자서 집에서 맥주에 라면이라도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 개인적인 소망도 있었지만,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있었던 독립이었는데. 혼자만이 있는 집이 매우 적막하고 고요했다. 평소 좋아하던 그 침묵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당신이 좋아하던 예능 프로를 켰다. 컵라면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예능 프로를 켜놓고 잠이 들었다. 내가 잠들 때까지 누군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잠들 때까지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마음도, 눈도 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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