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과인간 Sep 08. 2018

바람이 분다, 누군가 그립다

오랜만에 바람이 선선해 기분이 날아갈 듯 즐거웠던 밤. 잠옷 차림이어서 멀리 나가지 못하고 사람이 그나마 덜 다니는 집 앞 거리를 서성거렸다. 같은 곳을 이리저리 걷던 것도 잠시, 작은 나무의자에 앉아 바람을 만끽했다. 바람이 불어와 온몸을 휘감고 옷과 머리카락이 모두 나풀거리자 가슴이 쿵쿵대며 벅차올랐다. 이렇게 나와서 바람을 맞을 수 있어서 정말 좋다고, 역시 혼자 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원래 집이었으면 애초에 이 시간에 나올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막상 앉아 있다 보니 함께 앉아 있을 누군가가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분 좋은 바람을, 함께 맞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그렇게 앉아 있는데 낯선 여자애가 말을 걸었다. 홍대 기숙사가 어디냐고 묻는다. 가본 적은 없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다. 이 밤에 웬 홍대 기숙사지, 했는데 손을 보니 홍대 학생증이 들려 있다. 홍대 학생인 듯한데 취해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술 먹고 길을 헤매는 나 자신이 그 여자애에게 오버랩되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당장 길안내를 해주었다. 잠옷 차림이라 큰길까지 나가기 아주 민망했지만 여자아이 한 명을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살이냐 물으니 스물한 살이라고 한다. 나한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힘든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뭐가 있긴 있었단다. 그래도 이렇게 주량 넘게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자기가 잘못했다고 한다. 술에 취했어도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혀 있는, (나랑은 다른)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였다. 짧은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그 아이를 큰길까지 데려다주었다. 여기서는 자기가 알아서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연신 고맙다며 머리를 숙이는 그 아이에게 이상하게 내가 더 고마운 느낌이었다. 짧지만 즐겁고 풋풋한 만남이었다.


다시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좋아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찮을 텐데도 늘 전화를 잘 받아주는, 정말 소중한 친구이다. 전화를 받더니 오늘은 술 안 먹었네, 하고 놀란다. 맨날 술 먹고 전화해서 욕만 하는데도 전화를 잘 받아주는 친구라 또다시 고마운 마음이 차오른다. 밤바람이 너무 좋아서 행복해서 전화를 걸었다니까 웬 감성이냐며 핀잔을 주지만 요즘 한참 우울하던 내가 신나 하는 것처럼 보이자 친구도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 있었던 재미있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면서 박장대소하고 있는데, 내 앞에 또 누군가 멈춰 섰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는 단골 맥주집 직원이다. 나를 보고 그도 놀란 듯했다. 어느새 친해지기도 했고, 내가 술을 마시고 자주 민폐를 끼쳐서 늘 미안한 사람인데 이렇게 만나니 민망하면서도 굉장히 반가웠다. 사람이 그리웠던 밤이라 그랬나 보다. 먹을 걸 사러 편의점에 간다길래 졸졸 따라갔다. 뭐 고르는지 봐서 계산을 좀 해줄 셈이었다(그동안 이 친구 퇴근 못하게 붙잡고 있었던 게 몇 번인지!). 그렇지만 그는 계산은 됐다면서 오히려 나한테 먹고 싶은 게 없는지 묻는다.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늘 보던 장소 밖에서 보니까 또 새롭고 반가웠다. 그렇게 같이 쇼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맥주집 사장님도 만났다. 사장님은 나를 볼 때마다 짓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띠고 인사를 했다(쟤는 또 저기 왜 있지...? 같은 느낌이다). 사장님은 나를 안 반가워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사장님을 봐서 반가웠다.


바람이 불어서 행복했고, 행복하면 그 행복을 나눌 사람이 같이 있어주기를 바라는 거구나 하고 단순한 깨달음을 얻은 밤이었다. 나는 힘들면 혼자 있고 싶어 하고 기분이 좋으면 같이 있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 글을 쓰는 지금도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인간이란 바람 하나로도 이렇게 황홀해지는 존재로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