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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과인간 Oct 20. 2020

점심시간이 끝나자 너희는 나를 두고 돌아갔지

#백수일기 2일차_2020년 10월 20일

  회사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오기로 한 날이다. 회사와 친구라는 말의 조합인 '회사 친구'는 잘 쓰이지 않는 어색한 말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칭하고 있다. 동료라고 하기에는 많이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 여러 해 동안 매일 얼굴을 보며 함께 웃고 함께 화냈던, 가치관과 취향이 닮아 있는 사람들. 그러니 친구라고 칭해야겠지.


  퇴사한다고 해도 물론 자주 볼 거라고 생각했지만, 퇴사 이틀째에 볼 줄은 몰랐다.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화요일 점심에 바로 우리 집으로 놀러오겠다고 해주어서 나도 기쁘게 답했다. 어제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청소를 미루었으니, 아침 일찍 청소를 해 두어야지.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뜬 시각은 7시 40분. 알람은 8시 30분에 맞춰두었는데 왜 또 이렇게 일찍 깨는 건지.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늦게 일어나는 데 금방 적응해서 10쯤 눈뜨겠지? 1시간가량 더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서 아련한 무드의 The Marias의 Care For You를 들었다. 발로 커튼을 열고 눈을 깜빡깜빡, 손을 움직움직, 옆으로 돌아누웠다가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따뜻한 침대를 아직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 퇴사 선물로 받은 사진집 <윤미네 집>을 침대 옆에서 집어 들고 책장을 넘겼다. 사진찍기가 취미인 삼남매의 아버지가 딸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집가는 순간까지를 사진으로 모아둔 책이었다. 흑백사진이지만 가족들의 일상이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실려 있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아이인 모습이 더 친숙한 주인공 윤미는 지금 어엿한 성인 자녀 둘을 둔 엄마가 되었고, 윤미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육아란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간을 너무 빨리 흐르게 만드는 것 같아 따뜻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도 눈물을 훌쩍이고 코를 닦으면서 봤으니까 아마 감동이 걱정보다는 조금 더 컸던 모양이다. 여유 있게 사진집을 다 보고 나니 어느새 9시 30분. 그럼 이제 친구들이 오기 전에 청소를 시작해보실까!


  자취를 시작하기 전에는 청소를 참 싫어했다. 내 방만 치우면 되는 거였는데도 말이다. 엄마한테 늘 돼지우리라고 타박을 들으면서도 청소를 하지 않았던 건 아마 그곳을 온전한 내 공간이라고 느끼지 못해서였던 듯하다. 지금 나에게 청소는 귀찮기는 하지만 꽤 즐거운 일이다. 특히 오전에 방을 치우고 하루를 시작하면 그 깨끗함이 종일 가기에 더욱 뿌듯하다. 쓰레기를 모아 내다 놓고 나니 어느새 10시 30분.


  30분 동안 짧게 요가를 했다. 홈요가는 늘 짧고 쉽게 하는 편이다. 힘든 동작은 요가원에 가서 하는 일로 미뤄둔다. 집에서 힘든 동작을 하려고 생각하면 하기도 전부터 지쳐서 아예 매트조차 깔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요가를 하는 목적이 근력운동이라기보다는 정신 수양과 유연성을 위한 거니 30분이면 그 효과는 나름 충분하다. 이제는 시간이 많아졌으니 조금씩 시간을 늘려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11시에 요가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자 어느새 친구들이 도착할 시간이다.


  비교적 점심시간이 자유로워 조금 일찍 나섰다가 조금 일찍 들어갈 수 있는 회사라, 친구들은 11시 45분에 엉덩이를 떼어 살금살금 피자를 사들고 우리 집으로 왔다. 회사 코앞에서 자취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친구들이 도착한 시간은 11시 55분.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자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는 이렇게 밖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이. 약속을 잡아야만 얼굴 볼 수 있는 사이. 일부러 나를 보러 와주는 사람들이 고마운 마음.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넷이서 복작복작 작은 집에 옹기종기 앉아 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1시 10분이 되었다. 점심시간은 항상 짧게 느껴졌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가야겠다고 하며 친구들이 일어났다. 장난스레 나도 같이 가자며 팔을 붙잡는다. 정말로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면 무거운 발걸음으로 투덜대며 들어갔을 텐데, 막상 나만 놔두고 친구들이 다 가버리니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제 누워 있을 거다! 너네는 가서 일해라!"


  웃으며 친구들을 배웅하고 나자 괜히 마음이 쓸쓸했다. 친구들이 쓰고 간 컵과 앞접시를 닦으며 되뇌었다. 이게 내가 선택한 삶, 내가 선택한 일상이라고. 설거지를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하자 친구들의 카톡이 와 있었다. 금요일 점심에도 우리 집으로 오겠단다. 물론 환영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앞으로 우리 집에 놀러 오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보고 싶은 만큼 그 얼굴들을 보련다. 금요일에는 친구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한번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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