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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과인간 Oct 19. 2020

사랑을 시작한 날처럼 세상이 반짝였다

#백수일기 1일차_2020년 10월 19일

  이 매거진은 이제 다시 쓰는 일이 없기를 바랐건만, 백수일기라는 제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2020년 10월 16일부로 5년 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다. (정확히는 4년 10개월이고, 실제 퇴사일은 11월 19일이지만)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첫날이고 첫날에는 놀아야 하니까 머리 아픈 얘기는 집어치우련다.


  퇴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수없이 고민하고, 결심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까지 약 일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쉽지 않았다. 이전 직장을 그만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시원'섭섭이었다면 지금은 시원'섭섭'에 가까웠다. 내가 이만큼의 사랑을 받아도 되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회사를 나섰다. 물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다들 금방 적응할 거고 당연하게도 회사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받은 애정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이왕 그만두었으니 그래도 여행은 다녀와야지 싶어 주말에 1박 2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니 몸이 너무 고되어서 어제는 일찍 잠들었다. 늦잠을 잘 생각에 알람도 안 맞추고 잤지만 아침에 졸린 눈을 떠보니 귀신같이 7시 15분이었다. 습관이 무섭기도 하지. 다시 누워서 잠을 청했다. 9시 30분이 되자 기분 좋게 눈이 떠졌다. 재지팩트의 Vibra를 들으며 손발을 움직움직, 눈을 깜빡깜빡하며 잠을 깼다. 허둥지둥 씻고 나갈 필요가 없었으므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많아질 거라는 핑계로 어질러둔 집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잠으로 보충한 에너지를 끌어내 퇴사 선물로 받은 한 보따리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눈물이 날지도 몰라서 편지들은 다시 읽지 않고 그냥 모아두었다. 평소 물건을 잘 사지 않는 편이라 이렇게 수많은 물건이 새로 생기는 건 생일이 아니면 없는 일이다. 오히려 생일 때보다 더 많은 선물을 받은 것 같다. 하나씩 그 마음들을 새기며 정리를 다 마치고 나자 어느덧 10시.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 순서가 남아 있었지만 모른척하고 커피를 내려 쿠키와 함께 먹었다. 그리고 오늘은 뭘 할지 생각했다.


  퇴사 후 첫 평일 점심이니 아주 거한 걸 먹고 싶었다. 혼자 가기 좀 민망한 곳이지만, 하이디라오 훠궈를 선택했다. 훠궈를 먹고 다이소를 들러서 평소에 사려고 했지만 못 샀던 물건들을 사고 제출해야 할 마인드맵을 그리고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들을 하자.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지난주에 인사를 다 나누지 못했던 곳들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인사를 못하고 헤어져서 아쉽다는 분, 좋은 글 보내줄 테니 메일 주소 다시 알려달라는 분, 전화를 해서 좋은 이야기 해주신 분, 쓸쓸함을 느끼는 가까운 사람들 등등. 사람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아파왔다.


  샤워를 할 때 나는 가장 많은 생각을 한다. 아마도 유일하게 휴대폰과 함께 하지 못하는 순간인데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스마트폰은 인간을 망치러 온 구원자임에 틀림없다. 여하튼 샤워를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내가 퇴사한 게 잘한 일일까(이미 퇴사한 주제에 이딴 생각은 왜 하는 거지), 사람들이 나를 잊으면 어쩌지(내가 그들을 먼저 잊을 리는 없겠지?), 점심에 훠궈를 먹으면 저녁에는 뭘 먹지(회사를 안 간다고 살이 자동으로 빠지는 게 아닌데) 등등. 그렇게 사소하고 의미 없는 고민들을 하면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아, 그런데 날이 너무 찬란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하늘이 푸르고 밝았다. 마스크를 썼음에도 공기는 따뜻하고 신선했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빌라촌 골목길이 눈부시도록 생기가 넘쳤다. 얼마나 좋았냐면,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사귀게 된 다음 날 세상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내가 그동안 포기해왔던 거구나. 단번에 깨달았다. 지금 나는 쉬어 가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도. 옳은 선택을 했구나. 젊은 날 일 년 정도는 이런 시간을 보내고, 누리면서 살겠다. 


  그 뒤로 신나게 훠궈를 먹고 다이소 쇼핑을 마치고 나니 맨 처음 같은 신선함은 (벌써) 사라졌지만 처음의 그 느낌을 오래도록 내 기억하고 싶다. 나의 걱정과 고민을 모두 날려 준 신비로운 풋풋함. 그 덕에 이제야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게 되었다. 잘했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 순간을 만끽하면서 살자.


  이제 백수일기는 가능하면 매일 쓰려고 한다. 분명 하루하루가 소중할텐데, 기록해두지 않으면 그날그날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를 것 같으니까. 하지만 매일 써야 한다고 스스로를 강제하지는 않으련다. 당분간 내게 꼭 해야 할 일 같은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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