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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과인간 Oct 21. 2020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행복들로 가득한 하루

#백수일기 3일차_2020년 10월 21일

  아침에 음악을 들으며 일어나는 걸 좋아한다... 라고 쓰니 조금 있어 보이지만 사실 예전에는 출근하느라 바빠 그러지 못했고, 이건 재택근무 때부터 생긴 습관이다. 아무래도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지니 이런 작은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이제는 아예 퇴사를 해버렸으니 아무 때나 일어나도 된다. 잠이 깨면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날의 선곡을 정해 인공지능 스피커에게 틀어달라고 요청한다.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들으며 잠을 깨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오늘의 선곡은 Tom Misch의 Disco Yes로, 경쾌한 기타 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월요일, 화요일은 일독을 뺀다는 명목으로 걸렀지만 오늘은 반드시 요가원에 가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일 끝나고 피곤한 몸으로 가던 저녁 요가 말고, 오전 10시에 산뜻하게 시작하는 요가를 하고 싶었다. 아침밥을 먹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빈속으로 요가원에 갔다.


  코로나가 심해지고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되면서 요가원을 가지 않고 있었다. 두 달하고도 2주 만에 간 요가원은 여전히 침착한 공기가 떠돌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하지만 내 몸은 침착하지 못했다. 처음 요가를 배울 때처럼 이리 낑낑 저리 낑낑거리다가 시계를 보면 시간은 거의 그대로였다. 설상가상 배도 너무 고팠다. 예상외로 퇴사 후의 첫 요가는 여유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요가 후의 기분 좋은 상쾌함은 예상대로였다. 이제부터 다시 몸을 적응시켜 나가야지.


  집에 돌아와 굶주린 짐승처럼 밥을 먹고 난 후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아 이것저것 할 일들을 정리했다. 퇴사하고 나면 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은지. 게다가 몸을 쓰고 난 후 바로 밥을 먹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에라, 할 일이고 뭐고 나는 게으른 베짱이 라이프를 즐기련다! 자고 싶을 때 자려고 퇴사한 거니까. 그렇게 눈을 감고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오후 4시였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스터디에 참여하러 이태원으로 향했다.


  격주 수요일은 글쓰기 스터디가 있는 날이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은 크게 세 가지 주제인데, 각각 실용서/에세이/소설이다. 일주일에 한 편씩 서로 글을 보내고 격주 수요일에 만나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아무래도 얼굴을 보면서 하는 피드백이다 보니 좀 순한 맛이다. 너무 서로 좋은 이야기만 해주는 게 아닌가? 이래서 피드백이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순간이 즐거워서 거의 반년째 계속해오고 있다.


  오늘의 피드백도 긍정적인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매번 그들에게 보여주는 내 글은 어찌나 창피한지. 다음에는 좀 더 잘 써가야지, 더 정리된 글을 가져가야지 늘 생각하지만 오히려 점점 못 쓰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퇴사도 했으니, 다음 모임에는 다들 깜짝 놀랄 만한 멋진 글을 가져가야지. (과연?)


  저녁을 일찍 먹은 탓인지 스터디가 끝나자마자부터 배가 고파온다. 하필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의 카톡 프로필이 탕수육이다. 탕수육이 아주 먹고 싶어졌다. 요즘 살도 쪘는데... 직장 그만둬서 돈도 아껴 써야 하는데... 8시부터 고민을 시작해서 9시까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주문해버리고 말았다. 이번 주는 퇴사 직후 주간이니까 조금 더 순간의 행복들을 누려도 되지 않나, 하는 합리화를 하면서. 지금은 탕수육을 기다리며 오늘의 백수일기를 쓰고 있다. 마치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처럼. 뭐 어때, 어차피 내일 출근도 안 하는데! 맥주도 한 캔 같이 해야겠다. 신난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행복들로 가득한 하루였지만, 사실 난 이런 걸 위해서 회사를 그만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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