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4일차_2020년 10월 22일
상큼한 노래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서 잠에서 깨자마자 아이유의 <내 손을 잡아>를 들었다. 이때만 해도 어렸던 아이유가 굉장히 맑고 시원한 고음을 주로 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느새 매력적인 음색과 분위기를 단단히 다져서 완전히 다른 느낌을 내는 싱어송라이터가 되었다. 잔잔한 노래도 듣고 싶어서 <무릎>까지 이어 듣고 비로소 눈을 떴다.
독서는 늘 좋아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읽는 책이 가장 흡수가 잘된다. 오늘은 오은경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을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92년생이 쓴 시집이라 그런지 어려운 표현이 없고 이래저래 공감이 가는 글들이었다. 다만, 읽다 보니 시인의 어둡고 슬픈 감정이 전이되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우울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해버리겠군. 일어나자마자 읽는 시집은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감정이 완전히 다운되기 전에 일어나 우유에 쿠키를 먹었다. 역시 먹는 것만큼 쉽게 기운을 북돋우는 일은 없다.
오늘의 빅 미션은 엄마 책의 편집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본문 정리는 거의 다 해두었지만, 아직 표지에 들어갈 글귀들인 표지문안은 작성하지 못했다. 엄마가 다 작성해서 주실 줄 알았는데 그냥 나보고 쓰란다. 딸이 편집자니까 그럴 수는 있지만... 그래도 본인 책인데 너무하시네!
엄마가 직접 쓴 책의 제목은 <미주알고주알>로, 내년 초 퇴임을 앞두고 그동안의 인생 사건들을 정리한 자서전이자 에세이집이다. 누구의 인생인들 그렇지 않았겠냐만은 엄마의 인생은 특히 고난과 역경이 많았다. 퇴임을 앞둔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본인의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서 기록해두고 싶으셨나 보다. 이왕 쓰시는 거, 편집자인 딸이 아예 책으로 찍어드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나실 때마다 조금씩 쌓아 온 글들이 쌓여 한 권의 책이 되기를 앞두고 있다.
현역 편집자일 때 아예 원고를 넘겨 버리면 참 좋았겠지만, 마지막으로 치달을수록 해야 할 일들이 많아져 (핑계) 결국은 퇴사를 한 후에야 엄마 책의 편집 마무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편집자를 그만두자마자 하는 일이 결국 편집자의 일이 된 것이다. 이제 그만하겠다고 생각한 일을 바로 다시 해야 되는 괴로움은 그러려니 하고서라도, 나는 혹시 책을 만드는 게 그냥 운명은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여하튼 내 고통은 고통이고, 엄마 책은 멋지게 마무리를 해 드려야 했으므로 정성을 다해서 표지문안을 작성했다. 엄마가 저자 소개를 쓰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내가 감사와 애정을 듬뿍 담아 대신 작성해 드렸다. 약간 오글오글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지만 퇴임 선물이므로 이 정도는 느끼해도 될 거다. 나머지 문구는 본문에 있는 내용 중 인상 깊은 문장들을 따왔기 때문에, 표지문안 쓰기는 큰 어려움 없이 끝났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표지를 만드는 데 엄마와 디자이너의 의견이 갈리는 것이었다. 나는 중간에서 엄마의 의견을 듣고 내 의견과 조율해 디자이너에게 전달하고, 디자이너의 불평 어린 목소리를 듣고, 수정 시안을 다시 엄마에게 전달하고, 엄마의 의견에 내 의견을 얹어 다시 디자이너에게 전달하는... 편집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메신저(+설득) 업무를 다시 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러던 와중에 어느새 6시가 넘어 결국 인쇄를 넘기지 못하고 찝찝하게 일단 이 일을 덮어둬야 했다.
제발 내일 오전에는 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이것만 끝나도 마음이 한결 편할 것 같다. 퇴사한 지 4일째,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들에 치여 아직 심심한 기분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더 바쁜 것만 같다. 과로사하는 백수가 있다던데 그게 내 얘길까, 대체 언제쯤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날이 오는 걸까, 싶다가도 지금의 바쁨은 사실 스스로 만든 거겠지 하고 체념한다. 어쩌겠어, 나는 이렇게 뭘 계속해나가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 다만 이전보다는 훨씬 더 나 자신의 관심사,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