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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과인간 Oct 28. 2020

작곡을 하다

#백수일기 10일차_2020년 10월 28일 수요일

  사실 내게는 월 95,000원을 내고 사용하는 음악 작업실이 있다. 정상가는 20만 원이지만, 친구와 함께 사용하고 있는 동시에 할인 혜택도 받고 있기에 월 95,000원으로 10개월째 사용 중이다. 작업실이 있다는 건 참 거창한데 실제로 그곳에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노래 연습, 기타 연습이 전부다. 게다가 노래와 기타는 연습을 해도 10년째 제자리걸음이라 늘지도 않는다.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건 중학교 때부터였다. 노래방에 가면 친구들에게 곧잘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는 했던 터라 막연히 대학교에 가면 밴드 동아리에 가입해야지, 생각했다. 실제로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보컬로 밴드 활동을 했지만 동아리 성격이 하드락과 헤비메탈로 내 성향과는 영 맞지 않았다. 1년간의 짧은 동아리 활동을 끝낸 후 노래는 그냥 노래방에서 부르는 정도로, 음악 전반에 대해서는 손을 놓았었다.


  그런데 작년 여름, 동아리 선배의 연락을 받고 함께 음악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음악에 능통한 선배의 도움으로 나는 그저 노래만 부르면 되어서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는데, 선배가 나를 이성으로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그 활동은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약 반년 간 진행한 음악 유튜브는 결국 막을 내렸고, 이후 아쉬운 나머지 나는 친구와 함께 개인 연습실을 빌려 노래와 기타를 연습하고 있었다.


  연습실을 빌려 무엇보다 내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건 작곡과 작사였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물론 멋지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재능이 있었다면 10년 동안 이 정도 수준을 계속 유지하고 있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면서 틈틈이 작곡과 작사에 대한 책을 읽고, 유튜브를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초중고를 다니며 자연스레 접했던 글쓰기와는 달리, 곡 쓰기는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회사를 다니면서 동시에 곡을 써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대신 퇴사를 하고 나면 여유가 있을 테니 내 곡을 꼭 만들어봐야지 했었다.


  그리고 백수일기 9일 차를 쓰고 난 어젯밤, 나의 의미 없는 백수생활에 현타를 진하게 느끼고 난 후 작업실로 향했었다. 별일 없더라도 출석이나 하자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작업실에 도착하고 나니 가사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핸드폰 메모장에 간단히 가사처럼 보이는 몇 가지 글귀를 적었다.


  가사를 간단히 메모하고 나니 왠지 여기에 멜로디를 붙여 보고 싶었다. 아무렇게 붙일 수는 없고, 기존 가수들이 많이 쓰는 코드를 기본으로 해서 멜로디를 한번 만들어보자 싶었다. 히트를 많이 쳐 소위 '머니 코드'라고 불리는 Dm-G-C-Am 코드를 연주하면서 아까 적어 둔 가사를 흥얼거려 보았다. 어라, 음이 불안정하긴 하지만 뭐가 되는 것 같은데?


  조금 자연스럽게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게 되자 행여 잊어버릴세라 핸드폰 녹음기로 녹음을 했다. 그리고 녹음된 멜로디를 들어본 후 더 매력적이고 안정적인 멜로디로 살짝씩 바꾸었다. 그렇게 verse를 녹음하고, pre-chorus를 녹음하고 나니 약 40분이 흘렀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아니다. 겨우 40분. 그 짧은 시간에 곡의 일부분을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chorus, 즉 후렴은 아직 정하지 못한 채였다. 그래도 태어나 처음 해보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뿌듯한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뜨고 요가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10시부터 11시까지 요가를 한 후 12시부터 회사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 날이었다. 그런데 요가 수업이 이상하게 오래 걸려서 거의 11시 15분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동작인 송장 자세를 하면서 지금 확 일어나 버려, 아니면 그냥 끝까지 있어 고민하는 도중 후렴음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이 음을 까먹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요가 선생님께 눈인사를 한 후 겉옷을 걸치고 요가원을 나섰다. 5층짜리 건물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머릿속에서 들린 후렴음을 핸드폰 녹음기로 녹음해두었다. 불안한 멜로디였지만 이따 다시 들으면 괜찮은 멜로디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다시 작업실로 향했다. 아까 녹음해두었던 멜로디를 듣고, 거기에 코드를 입혀 듣기 괜찮은 음으로 탈바꿈시켰다. 가사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 약간은 진부하고 유치한 가사였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내게는 곡을 하나 완성한다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그렇게 verse, pre-chorus, chorus까지 모두 완성하고 나니 1절 작업이 끝났다.


  완성된 곡을 들어보니 나름대로 그럴듯했다. 물론 허접한 건 당연하지만, 뚝딱 만들어낸 것 치고 나쁘지 않았다. 첫 자작곡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했다. 친구에게 곡을 보내주었더니, 들어 본 친구가 무슨 곡이냐고 물었다. 내가 직접 만든 곡이라고 하니, 진짜 기성 곡인 줄 알았다며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곡이 아주 좋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솔직한 녀석 같으니) 텐션이 너무 좋고 자기도 자극을 받았다며 저녁에 자작랩을 녹음해 내게 전송해주었다.


  보잘것없지만 나의 노래를 한 곡 만들었다는 점, 퇴사 전부터 별러왔던 일 중 가장 자신 없었던 작곡을 시작했다는 점, 친구에게 자극을 주어 자작랩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많이 기쁘다. 결국 어제 백수일기를 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 끝에 곡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니 퀄리티는 차치하고라도 계속해서 글을 써왔다는  사실, 그리고 결국 그 글을 통해서 한 곡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스스로 몰아세웠다면 오늘은 스스로 토닥이는 밤을 보내고 싶다.


  곡을 만드는 과정은 내가 지식이 없는 탓에 참 허접했지만 그래도 즐거웠고,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어떤 부분을 일깨우는 과정이었다. 이 분야를 내가 좀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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