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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과인간 Oct 27. 2020

퇴사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백수일기 9일차_2020년 10월 27일 

  어느덧 퇴사한 지도 9일 차, 거의 열흘이 되었다. 이제와서 깨닫게 된 건 회사가 나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아니었듯, 퇴사도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만 안 나가면 내 시간을 주체적으로 쓰면서 요가도 가고, 달리기도 하고, 글도 쓰고, 작곡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중 지금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퍼질러 자고 일어난 오늘 저녁 갑작스레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직 퇴사 초기고, 푹 쉬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 변명해 보았지만 사실 알고 있다. 그저 게을러서 그렇다는 것을! 그나마 회사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부지런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거라는 사실을. 이쯤에서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어제저녁에는 '퇴사자 모임'이 있었다. 1명의 재직자와 3명의 퇴사자(나 포함)가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나는 퇴사한 지 3년이 되어 다른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고 하나는 퇴사한 지 반년이 되었으며 아직 쉬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가 따끈따끈한 신입 퇴사자(?) 나였다. 


  퇴사 선배님들(?)은 그 나름대로 퇴사 후 본인이 원하는 걸 달성했겠지만 (사실 일독을 빼고 푹 쉬기만 해도 충분한 거니까) 의외로 회사를 다닐 때나 안 다닐 때나 아주 큰 차이가 있지는 않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그런 것 같았다.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시간은 후딱 흘러가는데, 여전히 운동을 하거나 글을 쓰는 등의 생산적인 활동들을 집중해서 규칙적으로 하지 못하고, 매끼 내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데도 다이어트는커녕 맛있는 음식과 술을 보면 정신을 못 차렸으며, 하루를 대충 보내든 열심히 보내든 저녁 6시만 되면 피곤했다. 내일이 있으니 오늘 저녁은 빈둥거리면서 대충 보내도 큰 문제없겠지, 하며 할 일들을 미뤄둔 채 저녁 일찍부터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다가 잠드는 모습은 회사를 다닐 때나 퇴사한 이후나 똑같았다.


  내가 그동안 중요한 일들을 뒤로 미루면서 살아온 건 회사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나의 성향이었구나. 하지만 기껏 큰 결심하고 퇴사까지 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 퇴사 전과 후가 똑같으려면 퇴사를 왜 했나. 차라리 돈이라도 벌지. 어쩌면 퇴사를 말렸던 사람들은 인간이란 이런 존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돈이라도 벌으라는 뜻으로 말렸던 건 아니었을까. 


  반면에 열심히 일하다 퇴사하고 나서 일독 좀 빼고 편하게 쉬는 게 뭐가 나빠서 스스로 몰아붙이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열심히 살아도 되지 않나.


  그렇지만 내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아직까지는 그 일들을 하기 위한 시간이 많아 보이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계속 흘려보낸다면 언젠가는 시간이 바닥나서 쓰지 못하게 되겠지.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데, 헛되이 보낼 순 없다. 


  퇴사했으니 푹 쉬는 것 좋다, 소소하게 여유 부리는 것도 좋다. 하지만 무의미하게, 애매하게, 대충 시간을 흘려보내지는 말자. 만약 지금 쉬기로 결정했다면 정말로 푹 쉬었다가, 다시 에너지를 가지고 해야 될 일들을 해나가자. 그래야 이 모든 시간이 지나고 스스로 돌아봤을 때 후회가 없을 것이다. 퇴사는 그저 퇴사일뿐,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앞으로의 내 인생은 결국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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