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과인간 Oct 26. 2020

문이 안 열리세요? 하루만 기다리세요! 괜찮죠?

#백수일기 7일차, 8일차_2020년 10월 26일

  어제는 주말을 맞이해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문래동으로 향했다. 오래된 철공소들과 힙한 가게들이 함께 있는 문래동의 풍경은 을지로와도 닮아 있다. (개인적으로 혼자 가기는 조금 무섭다고 느낀다) 예전 연남동 풍경이 떠오르기도 해서 좋아하는 동네다. 처음 가본 식당에서 오리고기를 먹었는데 아주 맛있어서 소주도 각 일병씩 해치웠다. 신나게 데이트를 하고 집에 왔는데, 이런...! 문이 안 열린다.


  전원이 꺼진 건 아니었는데, 도어록의 터치 키보드가 안 먹혀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이게 웬일이람. 집에 못 들어가면 정말 큰일이다. 핸드폰으로 '도어록 안 열릴 때'를 검색해 보고, 편의점에 가서 건전지를 사 와서 도어록에 대보기도 하고, 안 눌리는 터치 키보드를 계속해서 눌러대며 20분쯤 씨름을 하다 보니 점차 키가 하나씩 눌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집에 들어올 수는 있었다.


  그나마 남자친구가 함께 있었고, 외출했다 들어오는 길이라 핸드폰과 지갑, 그리고 두꺼운 겉옷까지 입고 있었기 때문에 침착할 수 있었다. 핸드폰이나 지갑 없이, 겉옷도 없이 집 앞에 쓰레기만 잠깐 버리러 나갈 때도 있는데 만약 그때 안 열렸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저녁 7시쯤이었으므로 바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이사를 오고 난 후 바뀐 집주인이라 사실 모르는 사람에 가까운데, 지난 일 년 간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가 이번에 처음 연락한 것이다. 정확히는 집주인도 아니고 집주인 동생분이다. 집주인은 외국에서 살아서 집주인 동생분이 대리인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동생분께 도어록 고장 난 건 집주인이 수리해 주는 걸로 알고 있으니 바로 수리기사를 불러서 고치겠다고 했는데, 집주인이 외국에 살고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고, 연락이 닿으려면 내일 저녁은 되어야 한다고 한다.


  당장 집 앞에 못 나가는 판국에 내일 저녁이라니! 내일 저녁까지 기다리는 건 좀 어렵고, 내일 부동산에 연락해서 설치기사님을 부르겠다고 했다. 집주인 동생분은 자기가 어떻게 말해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만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글로벌 시대에, 당장 문이 열리지를 않는데, 시간이 하루나 필요하다고요?


  그리고 오늘이 되었다. 도어록은 어젯밤보다는 상태가 나아져서 띄엄띄엄 작동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터치 키보드가 잘 먹지 않았다. 이 상태로 외출은 무리였다. 그나마 내가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백수 기간에 고장이 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출근해야 하는 상황에 도어록이 이 모양이었다면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얼마나 불안했을까. 이건 감사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저녁 약속이 있어서 그전에는 어쨌든 집 밖으로 나가야 하고, 최대한 빨리 고쳐야 마음이 덜 불안할 것이었다.


  오전에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설명하니, 일반적으로 집주인이 도어록 비용은 부담하는 게 맞지만 어쨌든 사전에 협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돈 받으려면 답답해도 참고 기다려야 하는 거였다. 도어록 회사에 전화해서 혹시 수리가 가능한지 물었다. 이제는 단종되어 가는 중인 모델이고, 수리비가 7만 원이나 발생하기 때문에 차라리 새것으로 교체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했다. 부동산에서 소개해 준 도어록 설치기사님께 전화해 보니 대략적인 견적을 듣고 집주인 동생분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했더니 아직 언니랑 통화를 못 했다는 말만 돌아왔다.


  내게는 거의 생존이 달린 문제나 다름없었는데 이렇게 속 터지게 그저 기다리기만 하고 있으니 정말 답답했다. 저녁 약속 전까지 언니와 연락이 안 되면 이 열릴지 안 열릴지 랜덤인 문을 두고 그냥 외출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약속을 취소해야 하는 걸까. 그냥 계속 기다리라는 게 말이 되냐고 화를 한번 낼까 하다가, 화를 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불쌍한 척을 하며 인정에 호소했다. 지금 불안해서 집 밖을 나갈 수가 없다, 그러니 빨리 통화 후 알려달라고.


  오후 2시쯤 드디어 연락이 왔다. 예상보다는 그나마 빨라서 반색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언니가 혹시 반반 부담이 어떻겠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계약 기간이 1년도 안 남은 세입자에게 절반을 부담하라니... 하... 이번에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조곤조곤 상황을 설명했다. 이사 온 후 안전고리를 설치했는데, 3만 원이 넘었지만 집주인에게 알리지 않고 내가 부담했다. 하지만 도어록은 다른 경우지 않나. 이사 나갈 때 떼어 갈 것도 아니고... 집주인이 비용 부담하는 것이 관례다.라고 화를 억누르고 차분히 말하자 그분도 굳이 이런 일로 분쟁을 만들기는 싫었는지 알았다고 했다. 본인이 언니에게 말하겠으니, 기사 불러서 도어록 고치라고 한다. 드디어!


  기사님께 전화를 드리자 15분 만에 도착하셨고, 5분 만에 작업을 뚝딱 마무리하셨다. 비용은 13만 원. 크다면 큰돈이지만 이걸 위해 계속 기다리고 마음 쓴 시간이 아깝고 내 신세가 서글퍼졌다. 지난번 집에 살 때도 느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세입자는 을이다. 역시 사람은 자기 집에 살아야 하는 것 같다. 얼른 돈 모아서 집 사야지. 그런데 어쩌지... 나 백수지. 13만 원이면 지금 내게는 엄청 큰돈이지. 그래, 그냥 이 정도로 잘 마무리된 현실을 받아들여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