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과인간 Oct 30. 2020

퇴사 후 팀 워크숍을 다녀오다

#백수일기 11일차_2020년 10월 29일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와 마지막 남은 힘으로 간신히 씻고 잠들었기 때문에 어제 일기를 오늘 쓴다. (그리고 오늘 일기는 내일 쓰게 될 것 같다) 어제는 신기하게도 전 직장의 팀 워크숍을 함께 다녀왔다. 워크숍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회사별로 천차만별이겠지만, 내가 다니던 회사의 경우 '놀고먹는' 게 전부였다. 올해 운이 좋게도 우리 팀 매출이 좋아서 목표 매출의 200%를 달성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 흔한 회식 한 번 없이 이렇다 할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1단계로 낮아지자마자 이때다 하고 팀 워크숍을 잡은 것이라고 했다. 평일 업무시간에 다녀오기 때문에 어찌 보면 일할 시간에 회사 돈으로 놀고먹는 포상 휴가와도 비슷한 개념이다. 하필이면 내가 퇴사하자마자 거리두기 단계가 낮아진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친했던 팀원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장난으로 '왜 나 퇴사하자마자 가고 난리냐! 나도 갈래!'라고 했는데, 그 팀원이 조심스럽게 팀장님께 정말로 내가 같이 가면 어떻겠냐고 권했고 팀장님도 내가 나가자마자 워크숍을 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흔쾌히 오케이를 해주셨다. 그리고 내게 같이 같이 가겠냐는 제안이 오자마자 나는 퇴사한 주제에 바로 가고 싶다고 했고. 팀원들이 고심해서 미리 여행 스케줄을 다 짜둔 덕에 나는 마치 돈 안 내고 여행 가이드를 받는 느낌으로 하루 종일 즐겁게 놀았다. 


  그렇게 5명이서 강화도로 떠났다. 먼저 전등사에 들러 가을 단풍을 구경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절은 굉장히 조용하고 고즈넉한 느낌이었다. 각자의 소원을 빈 뒤, 루지를 타러 다시 이동했다. 루지는 처음 타보았는데, 재미있었지만 생각보다 조금 무서웠다. 평소 전동 킥보드를 탈 때도 안전운전을 추구하는 타입이라 다들 신나게 앞서 나갈 때 나는 조심조심 그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이런 걱정쟁이 주제에 대책업싱 퇴사는 어떻게 했는지 속으로 신기해했다.


  루지를 타고 난 후 에너지가 필요해 장어를 먹으러 갔다. 민물장어와 갯벌장어가 있었는데 회사 비용으로 먹는 식사였으므로 당연히(?) 비싼 갯벌장어를 골랐다. 살아 있는 장어를 바로 잡아 불 위에 올리니 꼬리가 꿈틀꿈틀 움직였다. 미안함은 잠시, 잘 구운 장어를 입에 넣자 와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장어는 부드럽기만 한 줄 알았는데 쫄깃쫄깃 꼬들꼬들한 식감이 예술이었다. 운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맥주도 한 잔씩 했다. 퇴사하느라 못 받은 인센티브를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후 조양방직이라는 멋진 카페에 갔다. 오래된 방직공장 건물을 그대로 카페로 만든, 놀라운 공간이었다. 보통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이 실물보다 더 예쁘기 마련인데, 이곳은 사진이 실물을 못 담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실물이 아주 멋졌다. 엄청난 규모도 놀라웠고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빈티지한 물건들과 귀엽고 위트 있는 인테리어 배치가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한번 더 오고 싶었다.


  살짝 피곤한 상태로 서울로 돌아오니 4시 반 정도였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볼링장으로 향했다. 5명이서 팀을 나눠 볼링을 쳤는데 태어나서 볼링이라고는 딱 한번 쳐본 나는 팀에 누를 끼칠까 엄청 걱정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볼링은 재미있었고, 나도 의외로 나쁘지 않게 쳤다. 이번 주말에 당장 한번 더 와야지 결심했다.


  저녁도 평소보다 근사한 걸 먹자는 계획 하에 와인바로 향했다. 안주도 넉넉하게 시키고, 와인도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요즘 계속 고민하고 있는 결혼과 출산, 육아에 대한 고민들을 주로 나누었는데 나름대로 커다란 힌트를 하나 얻은 기분이었다. 역시 경험자의 솔직한 이야기만큼 도움이 되는 건 없는 것 같다. 느끼한 속을 달래려 마지막에는 이자카야에서 국물요리에 사케까지 먹고 나니 마지막 워크숍이 끝이 났다.


  나를 배려해주지 않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모두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어찌 보면 남아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퇴사자는 배신자(?)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다들 넓은 마음으로 불러 준 것이니까. 이렇게 마지막으로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팀과 회사가 더욱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퇴사 후 팀 워크숍을 다녀오다니, 정말 신기하고도 행복한 하루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곡을 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