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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과인간 Nov 01. 2020

할로윈과 콩나물국

#백수일기 12, 13일차_2020년 10월 31일

  할로윈의 규범 표기는 '핼러윈'이다. 포춘쿠키의 규범 표기는 '포천쿠키'이다. 쭈꾸미는 '주꾸미'고... 이렇게 규범 표기들이 훨씬 더 어색한 경우들이 있다. 나는 사실 이렇게 실제 쓰이는 말과 규범 표기가 다른 경우, 실제 쓰이는 말을 사용하는 편을 좋아한다. 다만 직업적으로 번역할 때나 책을 편집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마음에 안 드는 규범 표기를 쓰곤 했다. 생뚱맞은 얘기였지만 여하튼 이건 공식적인 일이 아니고 그저 개인적인 일기니까 핼러윈 대신 할로윈으로 쓰겠다.


  나는 매년 할로윈데이를 챙긴다. 할로윈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대중적이지 않아서 외국인 많은 이태원만 시끄러웠던 10년 전부터 챙겨 온 나름의 이벤트이다. 챙긴다고 해봤자 그냥 특이한 옷을 입고 친구들과 밖에 나가서 술을 마시는 것뿐이다. 소심한 관종이라 평소에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시선을 받을 자신은 없고 '할로윈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날에 안심하고 관종력을 뽐냈던 것이다.


  올해도 역시 할로윈데이를 즐겁게 보내고 싶었지만, 코로나라는 나쁜 놈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끼리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룸 형식의 펍을 예약했다. 각자 조금씩 특이한 옷을 입고 5명이서 만나서 놀기로 했다. 다만 집 지키는 강아지처럼 기다리고 있는 남자친구가 마음에 걸렸다.


  남자친구와는 반 년째 큰 싸움 없이 잘 만나고 있다. 다만 최근 열흘 동안 3번이 넘게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는 완전히 취해서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간 게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조곤조곤 서운한 티를 좀 냈더니, 알았다면서 원래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 약속에 빠진다는 거였다. 그렇게까지 하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리고 나는 정작 그날 친구들이랑 할로윈 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원래 친구들이랑 노는 걸 좋아하는 남자친구라, 나 때문에 친구들 모임에 안 간다고 하니 이건 아닌데 싶었다. 그렇잖아도 급 야근이 잡혀서 오늘 어차피 친구들 만나러 못 갔을 거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내 집에서 좀 쉬고 있을 테니까 나는 친구들과 편히 놀다가 들어오라고 했다. 


  뭐 본인이 그러겠다는데, 마음에 걸렸지만 결국 알겠다고 하고 나는 4시부터 친구들을 만나서 놀기 시작했다. 고기를 구워 먹고 와인을 좀 마시다 보니 어느덧 9시가 되었다. 남자친구에게 뭐하냐고 메시지를 보내자 답장으로 콩나물국을 먹고 있는 사진이 왔다. 사 먹고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내 집에서 끓여서 먹고 있단다! 소주까지 곁들여서. 아아, 마음 쓰인다 마음 쓰여.


  친구들과 놀면서도 마음은 계속 집으로 가고 있었다. 더 빨리 파하자고 하고 싶었지만 감히 주최자가 어떻게 그러겠는가! (그것도 남자 때문에!) 분위기가 좋았던 탓에 11시가 가까이 되어서야 수다가 끝났다. 친구 둘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고, 나머지 둘은 동네 친구여서 같이 집에 돌아가다 보니 나를 데리러 나온 남자친구와 마주치게 되었다.


  집에 콩나물국을 끓여놓았다고 하자 짓궂은 두 친구가 자기들도 맛 좀 보자고 장난을 쳤는데 남자친구는 거기다 대고 진짜 오라고 한다. 술도 마셨겠다 기분이 좋았던 나도 이 김에 남자친구에게 내 친구들을 소개해 주면 좋을 것 같아 환영하며 집으로 초대했다. 


  네 명이 식탁에 둘러 앉아 남자친구가 끓인 콩나물국을 후루룩 마시고 소주잔을 짠 부딪혔다. 콩나물국 맛은 사실 그냥 그랬는데(물론 아예 전혀 끓일 줄 모르는 나보다는 훨씬 나았다) 친구들이 칭찬 멘트를 날려주며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 친구 남편까지 얼렁뚱땅 참여하게 되어 다 같이 새벽 두 시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금까지 보낸 화려한 할로윈과는 아주 다르게 관종력을 뽐내지도 못하고 좁은 집에서 다닥다닥 붙어 앉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떠들어댔던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나답지 않게 꾸민 모습으로 잘 모르는 사람들과 노는 재미보다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소소한 즐거움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이게 나이들어 간다는 걸까. 이 멤버 그대로 올해 12월 31일을 같이 보내기로 했는데, 그때가 기다려진다.


다음날 아침에 남은 콩나물국에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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