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부터 지금 10월까지, 나의 온 백수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가 취업에 성공했다. 아주아주 기쁘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남의 성공을 이렇게 축하해 주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데, 정말 기쁘다. 그렇지만 혼자 남겨진 아쉬움이라는 게 없지는 않은가 보다.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하지만 또 한번 달리 생각해 보면, 이렇게 혼자 지내려고 일 그만뒀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여유시간을 많이 가지고 운동도 다니고 책도 읽고 자소서도 쓰고 번역 공부도 하면서. 이상하게 친구 하나 없어졌는데 시간이 엄청 많아진 것만 같다. 그동안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을 많이 보내긴 했나 보다. 오늘은 혼자 보내는 하루 특집으로, 아주아주 여러 가지 일들을 했고, 할 생각이다.
일단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억지로 한 건 아니고, 어제 일찍 잤기에 일찍 눈이 떠진 거다.) 7시 30분에 일어나서 따뜻한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며 8시 30분까지 이런저런 기사도 읽고 영상도 봤다. 조금 아까운 시간이긴 하지만 백수, 아니 갓수가 이 정도 여유는 느껴야 되지 않겠어? 그리고 8시 30분부터 30분 정도 논어를 읽었다.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책이라 이렇게 조금씩 야금야금 읽어 줘야 한다. 9시부터 30분간 양배추쌈에 밥을 싸먹고, 세수를 한 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원래 같으면 늦게 일어나서 허겁지겁 버스를 탔겠지만 오늘은 일찍 나섰고 돈도 아낄 겸 학원에 걸어가기로 한다. 삼십 분이면 충분하다. 아직까지 뜨거운 태양을 왼쪽으로 맞으며 학원으로 향했다. 지난주는 첫 수업에 가지 못해서 진도를 맞출 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 수업을 제쳐버렸다. 이번 주는 정말 열심히 나가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역시 뻣뻣한 나에게 댄스 수업은 어려웠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자, 없는 돈도 쪼개서 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우유를 샀다. 체중조절용 시리얼을 먹기 위함이었지만 이상하게 라면도 먹고 싶어서 라면도 사 버렸다. 살을 빼려면 라면과 치킨만 끊어도 성공일 것 같다.
시간이 있으니까 오랜만에 전기모자를 쓰고 헤어 홈케어를 한 번 해줘야겠다. 귀찮지만 샤워를 대충하고 머리에 미끌미끌한 트리트먼트를 바른 뒤 알몸으로 나와 속옷만 대충 입고 전기모자를 썼다. 20분 정도 런닝맨을 본 후에 다시 샤워실로 들어가 머리를 헹궈내고 샤워를 마친다. 그 사이 물을 뽀글뽀글 끓고 있고 면발이 도톰한 너구리를 넣는다! 매콤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풍긴다. 역시 라면이구나.
남은 런닝맨을 보며 라면을 먹는다. 오늘은 내일까지 꼭 돌아가야만 하는 개리를 속이는 내용이다. 개리가 안달복달하는 모습이 우습긴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많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제작진의 통보에도 프로답게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멋졌다. 밥을 다 먹고는 빨래를 갠다. 할 줄 아는 집안일이라고는 설거지, 청소, 빨래가 전부인데 청소는 아주아주 싫어해서 주로 빨래나 설거지는 하려고 하는 편이다. 빨래도 다 개면 내가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한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3시가 다 되어간다. 이래서 주부들이 시간 없다고 하는구나, 하루가 이렇게 빨리 가다니. 회사에서는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집에서는 빨리 흘러서 놀랍기만 하다.
내일 마감인 채용이 있어서 오늘은 꼭 자소서를 써야 하는데, 영 손이 안 간다. 논어나 또 읽어 볼까 하고 책을 30분쯤 읽었는데, 에구구 잠이 온다. 카누도 마시고 있는데 이상하네. 하도 카페에서 카페인 팍팍 들어있는 커피만 마시다 보니 카누는 커피로 느껴지지도 않나 보다. 한시간만 잘까, 이것도 갓수의 사치니까. 하지만 막상 누워보니 잠이 오지는 않는다. 아마 그냥 눕고 싶었던 모양이다.
몸도 정신도 평안한데, 이상하게 마음만 불편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걸까 불안한가 보다. 하지만 나는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거겠지? 마음을 다잡아 본다. 어부처럼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또 내일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지내다 보면 좋은 순간이 또 오겠지. 절대 취업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겪어서 알고 있다. 내 인생의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것. 그러려면 지금부터 행복해져야겠지. 행복하게 산다는 건 결국 행복한 순간순간이 모이는 거니까. 그렇게 단순한 거니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재미있는 일만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당장 예능만 보고 누워서 잠만 자고 맛있는 것만 먹겠다는 게 아니다. 책도 읽고 운동도 하고 영어공부도 하고 이렇게 글도 써 가면서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재미라는 게 또 있는 거니까. 둘 다 나에게 행복을 주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두 번째 행복이 더 큰 행복이다. 그 일이 끝난 이후에도 행복감이 유지되니까 말이다.
오늘의 나머지 일정이 또 여러 가지 남아있다. 자소서 쓰기, 화환 알아보기,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떼기, 엄마 저녁 차려 드리기 등등. 작은 행복을 만들어 나가자, 미래의 큰 그림을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