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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un 22. 2019

<기생충>. 입장을 위한 문법과 고립된 집

영화

  

1.(이 절은 이웃블로거 달팽이님의 게시글(「다른 반응 」)에서 착안했다.)



'La Parasite'가 호명되는 순간, 봉준호는 쾌재를 부르짖으며 연단으로 나섰다. 연단에 선 봉준호는 선배 감독에 대한 경의와 영화광으로서의 정체성을 밝히며 수상소감을 마쳤다. 이 장면은 무언가 낯설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무언가 결여되어 보였다. 결여에 대한 감각은 적정이라는 비교 대상을 전제한다. <기생충>(2019)의 경우 비교 대상은 과거 황금종려상 수상의 순간이다.


재작년 루벤 외스틀룬드의 <더 스퀘어>를 제외하면, 칸은 최근 4년간 ‘계급’의 문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영화들을 선택해왔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2016)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万引き家族)>(2017) 그리고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선택하고 있는 장르나 카메라가 인물과 맺는 관계는 천차만별이지만, 칸의 선택에는 당면한 시대에 대한 영화의 ‘책무’라는 것이 은연중에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어느 가족>의 수상 장면은 칸의 의도에 상당히 부합했다고 할 수 있겠다. 수상작이 발표되는 순간, 가벼운 미소를 띠며 일어난 켄 로치는 연단에 서서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인접한 종말로 이끌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한편,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말해야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수상 소감(acceptance speeh)의 시간을 정치 연설(political speech)로 바꿔놓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켄 로치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대립하고 있는 사람과 사람을, 가로막혀 있는 세상과 세상을 영화가 이어주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고 밝히며 영화가 가진 사회적, 정치적인 ‘힘’을 이야기했다.

최근의 황금종려상 수상 장면과 비교하면 <기생충> 수상 소감의 결여는 해명되는 것 같다. 봉준호의 수상 소감에 결여된 것은 ‘영화의 책무’다. 그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와 클로드 샤브롤”에 대한 경의와 “열 두 살짜리 영화광”의 정체성을 밝힐 뿐이다. 물론, 작가가 곧 작품인 것도, 수상 소감이 영화를 온전히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화감독이 쓰는 어휘를 보면, 그가 영화를 어떻게 사유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노엘 버치, 『영화의 실천』, 아카넷)는 노엘 버치의 말처럼 봉준호의 쾌재와 수상 소감은 <기생충>을 설명하는 실마리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생충>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어느 가족>과 같은) 결코 ‘세계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기생충> 은 ‘영화에 대한 영화’다.

   

2.

   

그러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로 어떻게든 다뤄져야한다. 인터뷰, 상(賞)의 정치학은 모두 <기생충>을 이야기하는 데 허수일 수밖에 없다. <기생충>의 “검은 상자”를 보기 전에 우리는 많은 길을 우회해야 한다. 봉준호로부터, 다시 시작하자.

봉준호의 김기영 사랑은 유명하다. 그는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에도, “김기영 감독님이 살아계시다면 이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98년에 돌아가셨다. 감독님 영화를 보면 부자의 욕망이 드러나고, 외부인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가 나온다. 외부의 침투에 관련해선 그분이 대가다.”며 <기생충>과 김기영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선을 적시한다. 그런데 ‘외부인의 침탈’이 봉준호와 김기영 유사성의 본령은 아닌 것 같다.

김기영은 산업화로 서울에 모인 지방 여성을 보고 <하녀>(1960)를 만들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주지하듯, 영화로 극화된 ‘하녀’는 2층 양옥집으로 표상되는 중산층을 무너뜨리는 공포의 존재였다. 봉준호와 김기영이 맞물리는 지점은 여기다.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에서 그려왔듯, 봉준호는 (김기영처럼) 실재에 미미하게 존재하는 징후를 극단화한 환영을 서사의 구심점으로 삼는다. “환영은 세계에 관한 주체의 생산물인 동시에 세계에 관한 주체의 지각”(미셸 드 세르토, 『루됭의 마귀들림』, 이충민 옮김, 문학동네)이다. 봉준호 영화가 장르 영화의 외피 안에 있을 때도, ‘세계’의 문제가 드문드문 침투하는 것은 환영이 실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준호 영화의 성취는 표상과 실재의 구조적 연관을 ‘해소’하는 “2류 좌파 선전영화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봉준호는 “표상과 실재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심연을 자의식적으로 드러낸다.”(허문영,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 『씨네 21』) 봉준호가 종종 자신의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구멍’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봉준호 영화는 거대한 ‘구멍’을 품고 시작한다. 미국의 독극물 방류를 허용하는 구조는 괴물의 제거로 달성되지 않고(<괴물>), 독재정권의 입맛대로 움직이는 공권력이 활보하는 한 연쇄살인사건은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다(<살인의 추억>). 봉준호 영화의 인물들이 종종 우스우면서도 동시에 가여워 보이는 점은, 그들의 사투가 (구조가 아닌) 한낱 파생을 둘러싼 헛소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에서-인용자) 김뢰하 씨가 워커 군화를 신고 용의자를 구타할 때 거기에 덧버선을 씌웠습니다. 사실 이건 제 머릿속에서 나왔는데 스태프에게는 항상 테스트 삼아 거짓말을 해봐요. 이건 내가 형사 인터뷰에서 들은 거라고, 그럼 다들 아, 진짜 리얼하네요, 그래요. 보여주면, 설득하면 믿는 거 같아요. 항상 스태프가 첫 번째 관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실제 형사를 취재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은 디테일이에요, (라고 시침 뚝 떼고) 말하는 거죠. (봉준호, 「주인공들이 너무 가여워요-봉준호, 임권택을 생각하(면서 자기 영화들을 돌아보)다.」)

   

봉준호는 개연성의 구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장르의 문법으로 접속하기 위해, 세계의 구체성을 소거하고 시치미를 뗀다. 그러나 시치미는 발목을 붙잡는다. ‘알고도 모른 채 만든’ 허풍은 ‘모르는 척 하지만 안다’에 의해 찔릴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시치미로 눌러둔 세계는 삑사리로 돌아온다. 삑사리의 층위는 두 갈래다. 표층에는 행위의 삑사리가 있다. 총알을 잘못 세는 아들(<괴물>), 물고기를 밟고 자빠지는 혁명가(<설국열차>)처럼 시치미로 만들어진 세계의 인물은 개연성이 아닌 우연성 – 우연성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의 증표다 - 의 구멍에 빠진다. 중요한 지점은 심층에 존재하는, 이미지와 서사가 불화하는 삑사리-이미지다. 하수구(<살인의 추억>), 밤바다(<괴물>), 골목의 사이길(<마더>)처럼 봉준호는 때때로, 내러티브로 포섭할 수 없는 어둠에 유혹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미지는 서사의 작동을 멈춘다. 서사에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 이미지는 관객의 ‘주체성’에 대한 흥미로운 변전을 제기한다.

통상적 영화는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을 ‘관객’으로 예속/주체화(subjectification)한다. 인물에 감정 이입하고 영화라는 가짜 세계를 진짜 세계로 믿을 때,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의 원래-주체는 탈각되고 영화-내-주체로 결박된다. 기실, 관객에 의해 영화가 보여 지는 대상으로 객체화되기 이전에 관객 자체가 영화-서사에 의해 자리를 얻고 예속/주체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서사를 상회할 때, 재언하자면 영화-이미지와 영화-서사 사이의 존재론적 불화-‘삑사리’가 발생할 때, ‘관객’은 ‘영화를 보러 온 사람’으로 회복(回復)된다. 서사가 결박한 주체성은 이미지와의 조우를 통해 무너진다. 영화-서사 안에 접속한 주체성은 탈각되고, 이미지와의 만남과, 그것에 의해 바라보아지는 원래-주체가 돌아온다. 봉준호 영화의 시네마틱한 순간은 언제나 이 심층의 삑사리가 발생하는 순간이다. 서사의 시치미가 이미지의 삑사리에 의해서 무너지는 순간, ‘나’는 오히려 영화에 의해 응시된다.

봉준호는 계급과 국가의 문제를 오묘하게 걸쳐가지만 지배와 피지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중 누구에게도 시각의 주재자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서 냉소 이상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미지(未知)의 어둠이 구멍 내는 서사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머뭇거림이다. 시치미가 봉준호의 미학이라면, 삑사리는 봉준호의 윤리다. 




3.

   

그런데 이상하다. <기생충>의 세계는 균질하고, 또 매끄럽다. 근세가 기우를 수석으로 내리칠 때 가림 막 없는 화면의 심도처럼, 백주대낮 정원에서 일어나는 살인처럼, 영화는 모든 장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기생충>에 이르러 그는 더 이상 “심연을 자의식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봉준호의 페르소나인 송강호는 기택의 입을 빌어 “상징적이네”란 대사를 반복한다. “상징적이네”의 반복처럼, <기생충>의 모든 것은 정말로 상징적이다. 바꿔 말하면, 실제 같지 않다. 대만 카스테라, 필라이트 맥주,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는) 체육관 등 영화 속의 배경과 물체, 장소는 실재를 과잉 재현함으로서 (실재적이지 않은) 상징으로 변이한다. <기생충>은 리얼하지 않다. <기생충>은 리얼리티를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쯤에서 쉬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생충>을 봉준호의 이전 영화와 나열하고 ‘삑사리 이미지의 부재’•‘납작한 재현’을 일종의 미학적 퇴행으로 파악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마무리 짓기에 <기생충>은 ‘너무’ 적나라하다. 이 과도한 적나라함은 역설적으로 전면에 배치된 계급 우화 말고도 (숨겨진) 다른 이야기가 있음을 적시한다.

<기생충>에는 잠깐, 카메라가 서가를 스치는 장면이 있다. 봉준호는 이 장면에서 과시적으로 을유문화사가 출판한 『히치콕』을 전시한다. 이 장면은 이상하다. 물론, 봉준호가 히치콕을 존경하는 측면에서 오마쥬(homage)로 삽입한 장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 히치콕일까? 클로드 샤브롤, 앙리 조르주 클루조, 김기영이 아니라 왜 하필 히치콕일까? 어쩌면, 이 쇼트는 봉준호의 ‘다른 이야기’로 접속하는 입구일지도 모른다. 근세와 다송이 모스 부호로 (불완전하나마)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일정한 기호 체계와 문법이 공유되어야 한다. <기생충>과 관객의 경우, 그 문법은 『히치콕』이다.

김기영의 <하녀> 연작을 노골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집의 구조, (봉준호와 절친한) 구로사와 기요시가 애용하는 심도 깊은 쇼트 등 <기생충>에는 다른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많다. 그의 수상소감처럼 <기생충>을 채우는 것은 영화, 영화, 그리고 또 영화다. 이러한 맥락에서 『히치콕』의 재현은 다소 의도적이다. <현기증>(1959) 더욱 노골적인 <이창>(1956)처럼 히치콕은 ‘영화에 대한 영화’를 장르의 세계 속에서 구현한 대표적인 감독이다. 그렇다면, 봉준호의 <기생충>은 결국 ‘계급’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결국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기생충>에 대한 평은 수다하지만, “왜 하필, 기정(박소담 粉)이 죽는가?”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았다. 왜 하필 기정이 죽어야 하는가? 이는 기정이 팬티를 벗기 직전 이미지로 확증된다. 기정은 팬티를 벗기 전, 창밖으로 보이는 (외면상) 무산자로 보이는 남자 둘의 싸움을 본다. 기택을 ‘집’으로 접속시키기 위해서, 운전사(박근록 粉)를 해고시킬 계략을 짤 때 기정은 이 싸움의 본질이 무산자와 무산자 사이의 갈등임을 꿰고 있었다. 마침내 가정부 문광(이정은 粉)까지 해고시키고, 충숙(장혜진 粉)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동익-언교의 ‘집’으로 들어섰을 때, 그 모든 과정은 싸움의 본질을 알고도 시작한, 곧 시치미를 뗀 기정 때문에 가능하다.

시치미 떼기를 통해서만 인물들은 동익-언교의 ‘집’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갈등이 펼쳐지는 이 ‘집’을 지은 건축가의 이름이 ‘남궁현자’란 점은 흥미롭다.(이 점에 대해서는 이웃블로거 탄소포인트님도 지적한 바 있다. )

.  주지하듯, <설국열차>에서 (봉준호의 페르소나인) 송강호가 연기한 열차의 보안 설계자는 ‘남궁민수’다. 두 편의 영화에서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세트를 설계한 사람의 성이 ‘남궁’이란 점은 이들이 외재(外在)적인 동시에 장소 자체를 구축하는 존재로서 감독 자신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시치미를 뗀 기정의 가족이 도착한 곳은 단순히 동익-언교의 ‘집’이 아니라, 봉준호의 영화 세계 그 자체로 보인다. 시치미를 떼야지만, 봉준호의 영화로 접속할 수 있다. 그러나 시치미는 (전술했듯) 삑사리로 돌아온다. 중산층으로 시치미 떼 보아도 냄새를 지울 수는 없다. 문광과 근세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삑사리다. 벌건 백주대낮에 근세가 기정을 찌르듯, 삑사리는 시치미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시치미와 삑사리, 모든 사건은 영화-집에서 일어난다.

<기생충>은 봉준호 영화 세계의 원리를 내재적(內在的)으로 품고 있다. 기왕의 영화들이 실제를 극화하는 과정에서 ‘시치미’를 뗐다면, <기생충>에 이르러 시치미는 극 안의 문법으로 포함된다. “봉준호라는 장르의 탄생”이란 평이 (의도치 않았겠지만) 확인하듯, <기생충>은 ‘봉준호라는 장르’의 컨벤션을 철저히 따른다. <기생충>은 그 소재인 계급을 다룬, 사회적인 영화가 아니다. <기생충>은 봉준호 영화 세계에 대한 메타 영화다.

   

4.

   

그런데, 진짜 ‘기생충’은 누구인가? 봉준호 필모그래피(filmography) 안에서 <기생충>의 위치와는 별개로, 영화 자체의 메타 영화로서의 미학적 정체성과는 별개로 말이다. 답은 봉준호다. 세계와 영화 사이에서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는, 긴장을 잃어버린 그는 장르적 컨벤션을 충족시키기 위해 계급과 사회 구조에 기생한다. <기생충>은 계급에 관한 영화도, 사회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기생충>은 영화에 관한,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영화다. 황금종려상을 심사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수상작은 영화 그 자체로만 평가”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시치미와 삑사리가, 그 자체의 ‘문법’이 되어버린 영화에서 나는 더 이상 그의 영화에서 아무것도 바라보지 못한다. 봉준호는 그 자체로 '장르'가 되버렸다. 변주의 틈이 없는 그의 영화는 시시한 평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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