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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an 29. 2019

<오발탄>. 보지 못한다는 것

영화


<오발탄>에서 정신이상의 노모는 자꾸만 “가자!”고 외쳐댄다. 그러나 노모는 갈 곳을 모를뿐더러, 갈 수 있는 신체능력조차 상실했다. 노모의 “가자!”는 능력과 계획이 없는 공허한 말이다. 공허한 말이라도 끊임없이 뱉어야하는 것은 지금의 위치가 정주(定住)할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모가 집(북한)으로 가는 길은 사라졌다. 항구적 길 잃음 상태와 능력의 부재는 (제목이 예증하듯) <오발탄>을 지배한다.

     

「<오발탄>의 기억」에서 허문영은 “그(철호-인용자)는 걸을 뿐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대개 허공이나 땅을 향한다. 흔히 모더니즘 영화의 출발로 일컬어지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로베르토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시카) 영화가 행동의 영화가 아니라 견자(見者)의 영화라고 한다. 상황을 변화시킬 행동의 가능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물에게 허락된 유일한 지각 양식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발탄>의 주인공에겐 행동은 물론이고 보는 행위조차 버거운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나는 허문영의 이 짧은 칼럼이 <오발탄>에 뒤늦게 도착한 가장 정확한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허문영의 말처럼, 철호는 수평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가 보는 세계는 항상 너무 높거나, 낮거나, 또는 괴롭다. 보는 것이 언제나 고통인 상태. 철호가 영화 말미에 발치하는 두 개의 거추장스럽고, 아프기만 한 사랑니는, 눈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철호는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항구적으로 길을 잃는다. 또는, 항구적으로 길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견자(見者)의 능력을 상실한 자는 대상을 직관(觀)할 수 없다. 눈에 비치지만(광학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의미론적) 세계. 풍경은 미끄러지고, 잡히지 않는 미지처럼 그에게 다가온다. 철호에게 세상은 언제나 자기보다 너무, 크다.

     

어느 날, 철호는 집 앞에서 노모의 “가자!”소리를 듣고 다시 집밖으로 나선다. 그는 한 오르막에서 안개가 가득 낀 서울 시내를 바라본다. 안개와 남자라는 요소는, 이 장면을 ‘숭고’의 미학으로 자주 거론되는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와 마주 보게 만든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숭고가 대상 자체의 거대함을 포섭하는 직관의 크기에서 말미암는다고 일렀다. 그래서일까. 견자(見者)의 능력을 상실한 철호의 뒷모습은 한없이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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