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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Nov 21. 2019

1950년대 영화와 동시대 감각

영화

1.     



<지옥화>(1958)의 첫 시퀀스 구성은 경제적이다. 첫 장면, 동식은 서울역 앞의 건달들에게 노자(路資)를 모두 뺏기고 만다. 다음 장면, 거리에 나앉은 동식은 지게꾼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지게꾼은 “참, 눈 뜨고 코 베먹을 세상이구만”이라고 이야기하며 담배를 태운다. 영화 시작 1분 30초까지의 이야기다. 상기 시퀀스에서 가장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은 서울역 한 복판에서 건달패거리들이 동식을 겁박하는 장면이다. 하얀 중절모를 어쭙잖게 맞춰 쓴 녀석들이 트집을 잡아서 동식을 구타하고 노자를 빼돌리는 장면은 비약적이다. 첫째로 폭행이 서울역 한 복판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둘째로 어깨를 부딪쳤다는 것만으로 폭행을 한다는 점에서, 셋째로 그들이 유니폼처럼 쓰고 있는 하얀 중절모의 통일성까지.      


남승식은 이 “하얀 중절모를 쓴 괴한들”의 정체를 파악했다.(좀스런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서 반가웠다.) 이들은 자유당 정권 ‘장충단집회 방해사건’으로 유명세를 올린 “동대문 사단 행동대장 유지광과 부하들”로 사진(첨부 사진 좌측)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하얀 중절모를 시그니처 처럼 맞춰 쓰고 있다. 남승식의 말처럼 당시의 관객들은 “영화 첫 장면의 하얀 중절모를 쓴 깡패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동대문 사단을 떠올렸을 것이다. 즉, 영화 속 하얀 중절모는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웠으며, 법이 오히려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주먹을 비호했던 50년대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현실을 나타내는 상징”을 읽었을 것이다.(남승식, 2018)     


2019년의 나는 첫 장면의 ‘비약’이 궁금한 동시에 쿨해 보였다. 1958년의 관객들에게 첫 장면은 단지 현실의 일부분으로 승인되는 그저 그런 장면이었을 것이다. 좀스러운 세부지만, 이러한 좀스러움이 감상 경험 전체를 대치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본 <지옥화>는 무엇보다 필름 누아르였지만, 1958년의 <지옥화>는 네오리얼리즘이었다.      


2.      



<양산도>(1955)를 보다가 놀란 장면이 있다. (김기영을 연구하고 있으며 그의 평전 저술을 삶의 웅대한 계획 중 하나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미 다섯 차례 이상 본 영화지만, 무령이 닭을 화살로 쏴 죽이는 장면은 볼 때마다 흠칫 놀란다. 흘러가는 장면이고, 피가 튄다거나 내장이 뿜어져 나온다거나 하는 ‘잔인함’도 없는데 말이다.     


<양산도>의 남자 주인공 수동은 무령에게 그의 연인 옥랑을 빼앗겨 목을 매달고 자살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끔찍하지 않다. 나는 ‘수동’의 주검을 보고 있을 뿐, 수동으로 분한 ‘조용수’가 살아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과격함도 픽션의 합의 아래로 포섭된다.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개나 강아지의 주검이 과잉 현전할 때도 나는 촉각적 끔찍함을 못 느낀다. 영화 말미에는 “이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동물은…”으로 시작하는 동물 보호에 관한 문구가 등장하리란 것을 아니깐.    

  

1955년, 한국영화, <양산도>에서 닭의 죽음은 픽션의 합의를 벗어난다. 영화 속 닭이 화살에 맞는 순간, 가상의 합의는 닭의 날갯짓과 함께 찢겨나간다. 영화-픽션과 카메라-실재의 이화(異化)가 일어난다. 1950년대의 관객들은 어떤 감각을 느꼈을까. 정박된 관객성으로부터 벗어났을까. 잘 모르겠다. 동물권에 대한 감각, 영화-캐릭터에 대한 감각 차이를 가늠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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