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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Nov 30. 2019

<돌아오지 않는 해병> 메모

영화

「대륙물과 협객물, 무법과 범법」에서 이영재는 “공산당을 들여놓고 공산당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그 폭력적인 걸로서 액션에 대한 어떤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호현찬의 말을 빌린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전쟁영화가 대륙물로 넘어가게 된 계기 중 하나를 ‘동족’을 ‘적’으로 상정하는 데서 오는 겸연쩍음에서 찾는다. (우선 이영재의 논의를 승인하자면) 산업적인 면에서는 ‘반공’과 ‘액션’을 겹쳐 팔았지만, 관객에게 먹혀들지 않는 잉여 기억이 남아있었다는 말이다.     


이영재의 글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이만희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반공에 토대함으로서 동족과 적 사이의 불일치를 봉합하는 것이 반공영화의 컨벤션이라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분열의 폭을 넓히고 그 양상을 응시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구일병의 여동생을 죽인 자는 같은 부대로 전속되는 최해병의 형이다. 구일병은 최해병을 죽이려든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그의 ‘동생이라서’지만, 심급의 이유는 (최해병의 대사를 통해 전달되듯) 최해병의 얼굴이 그의 형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대원과 같은 얼굴을 한 “뿔달린 악마”같은 ‘빨갱이’ 이 순간 카메라에 분명하게 포착되는 최해병의 실재감각은 가족-민족/반공의 개념을 이화하고 흔든다.      


구일병의 여동생이 죽었을 교회에서 홀로 살아남은 영희는, 구일병과 최해병을 화해시키려하지만 그 노력 또한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     

 

넌 모르니까 하는 말이야. 형의 얼굴을 너무도 닮은 나를 볼 쩍마다. 나의 형을 연상하게 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진단 말야. (최해병-굵게)     
그러면 앞으로 어떡할 모양이야.  
같이 있는 동안, 같이 있는거야.   
 이런 감정으로 어떻게 같이 있어.     
이렇게. 이렇게, 같이 있는거야. 우리들의 죄는 아니니까.     


최해병의 대사처럼. 그들은 그저 “같이 있는”다. 그러다가, “같이 있는 동안”이 되지 못하게 되는 순간에는, 같이 못 있게 되는 것이다. 갈등의 이유(너무나 비슷한 얼굴) 그리고 갈등의 미 봉합.      


더욱 놀라운 건. 분대 전체가 럭키 바를 가는 장면이다. ‘양공주’가 바에 국군을 받지 않자, 돈을 내고 술집을 모조리 부수는. 자본-폭력. 그리고 난장이 끝난 후 마음을 여는 ‘양공주’들. 전장의 크리스마스라는. 어떤 환상.           



내가 한국영화에서 본 가장 멋드러진 대사와, 아름다운 장면이 담긴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대해서는 아주 길고, 괜찮은 글을 써보고 싶다. 게시판의 제목처럼. 간략하고 아주 간략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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