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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an 12. 2020

정성일의 오역

영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한상준 역, 을유문화사, 2007)의 ‘추천사’에서 “그(프랑수아 트뤼포-인용자)는 그 유명한 테제,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결국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을 한 다음, 그 말을 신천한 사람이다.”(6쪽)고 적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뭐시기로 쳐보면, 12년 동안 소위, ‘트뤼포 테제’는 많은 곳에서 인용되면서 시네필 입문교리 역할을 해왔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트뤼포 테제'를 안 들어 본 사람이 오히려 더 적을 것이다.


2019년에도 여전히 《씨네21》은 연말결산 에서 이를 빌려,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첫째, 영화를 많이 보고 둘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셋째,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이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블로거 홍준호에 의하면, 이는 정성일의 오역이다. The Films in my life‘(by Francois Trauffaut, translated by Leonard Mayhew)를 살펴보면, 실로 그러하다.(프랑스 원문을 살펴 볼 수 없으니, 여전히 명쾌하지는 않지만)  



The Films in my life‘(by Francois Trauffaut, translated by Leonard Mayhew) 4p.


이쯤에서, 영화평론가 유운성의 정성일 비판이 생각난다.


“아침에 배달되어 온 오늘자 경향신문을 읽다가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쓴 부산국제영화제 관련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발견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프랑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영화제에 간다는 것은 시네필들에겐 마치 수도원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 마치 속세를 벗어나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자발적으로 하는 수행의 시간." 그는 흡사 바쟁이 수도원 생활과도 같은 영화제 체험에 임하는 시네필들에게 축성을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적고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앙드레 바쟁은 "영화제에 간다는 것은 시네필들에겐 마치 수도원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쓴 적이 결코 없다. 정성일 평론가는 칼럼에서 인용의 전거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사실 그가 참조한 바쟁의 글은 "종교적 의식으로 비치는 영화제"라는 제목의 짧은 에세이로 1955년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ema>에 실렸던 것이다. (이 글은 아직까지 한국어로는 번역, 소개된 바 없다.) 이 글은 정성일 평론가가 묘사한 바와는 정반대로 칸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국제영화제가 일종의 유사-종교적 절차에 입각하고 있음을 '풍자'하고 있으며 또한 시네필들의 경험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 바쟁의 원문에는 아예 '시네필'이란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 영화저널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이 불가피하게 '감내'해야 하는 - 자발적으로가 아니라 - 영화제의 종교적 제의들에 대한 우스꽝스런 묘사를 담고 있을 뿐이다.” (출처: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1/09/)


정성일의 오역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섬기도록 하며(바쟁 오역), 영화 비평/영화 이야기하기를 영화감독의 하위 단계에 정박시킨다(트뤼포 오역). GV가 감독/배우로부터 X피셜을 누설 받는 팬 미팅 장소가 되고, 영화평론가가 ’중개인‘이 된 것도, 어쩌면 정성일의 오역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구로부터의 승인도 받지 않은, 영화담론을 펑크로 취급하는 관객 제씨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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