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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un 11. 2020

오시마 나기사, 「일본의 누벨바그는 실패했는가」

한국영화사를 위한 비망록

아래 글은 잡지 『실버스크린』의 1964년 10월호에 실린 오시마 나기사와 편집부의 대담이다. 띄어쓰기·표기법은 수정하지 않았으나, 습관적인 수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나)와 같은 식으로 주를 달기도 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임의로 한글로 옮겼다. 흥미가 동하는 부분에는 옮긴이 주도 달아보았다. 일본어에 한해서는 일본어의 발음으로 옮겼다. 혹시 이 글을 전문적으로 활용할 생각이 있다면 필히 원본 문서를 확인하길 바란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




오시마 나기사,「일본의 누벨바그는 실패했는가」, 『실버스크린』, 1964.10.

누벨 버그의 기수 오시마 나기사(大島 渚)와 일문일답     


본지단독회견

일본의 저명한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가 내한하였다. 《한국인이 본 평화선》이라는 다큐멘타리를 촬영하기 위해서이다.

평화선이라면 우리들의 지대한 관심거리인데 그것을 상대방인 일본의 감독이 이를 작품화한다니 그에 대한 관심은 매우 크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사십세에 이르지 않으면 감독승진이 어렵다는 보수적인 일본영화계에서 파격적으로 약관 이십육, 칠세에 감독으로 승진하여 《사랑과 희망의 거리》를 만들어냈다.

그후 그가 소속한 쇼치쿠영화사(松竹映畫社)가 사업부진으로 허덕이자 당시의 제작총책임자인유시로(城戸) 사장은 새로운 지향의 영화를 획책하여 만회할려고 했다. 그것이 젊은 감독들의 누벨 버그적인 의욕과 맛취되어 일어난 것이 세칭 <쇼치쿠 누벨바그>이다. 오시마 감독은 그 기수로서 요시다 기주(吉田喜重)와 함께 눈부신 활약을 했다.

문제작 《청춘잔혹이야기》 《태양의 묘지》의 두 작품을 내 놓자 작품이 갖는 뚜렷한 주체성과 문제성의 제기 그리고 종래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선연한 영상 등으로 영화 쩌너리즘의 갈채를 받기 시작하여 그의 존재는 갑자기 제 일급의 것이 되었다.

종래의 산업영화에 식상한 관객들도 오히려 그들의 본격영화에 몰려들어 흥행적인 성공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일본의 밤과 안개》가 개봉사일만에 정치적인 이유로 창고에 들어간 후부터 그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그후 오시마 감독은 동영에서 《아마쿠사시로 토키사다(天草四郎時貞)》, 독립푸로에서 《사육》을 만들고는 근간의 이년을 쉬고 있는 형편이다.

그들의 활동이 단시일에 하강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일본영화의 상업주의가 이제 와서는 그들의 주장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과 또한 누벨 버그 그 자체에 대하여 대중이 비판적이 되었다는 점이 그 중요원인인 것 같다.

지금 오시마 감독은 영화작가로서의 자기의 자세를 굽히지 않으며, TV의 일을 보고 있다. 이번 다큐멘타리 작품도 TV의 의속이다.(편집자)     



1.  : 요즈음 누벨 버그의 불길이 꺼진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答 : 새로운 풍조란 언제나 그래왔습니다. 시대 사조에 따르는 유형적인 운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일본에서 이 운동을 할 때 우리들 스스로가 누벨 버그라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풍조에 의해 낡은 것을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자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누벨 버그란 이름을 붙여준 것은 쩌너리스트들이었습니다.

불란서에서도 누벨 버그 운동이 그러했듯이 요즈음 일본에서의 누벨 버그도 잠잠해진 느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무슨 운동이고간에 그 운동이 싹트지 않으면 안될 시대적인 환경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일본에서도 이 운동이 그러한 시대요청에 의한 필연적인 계기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일본으로 보아서는 누벨 버그를 내 세우던 초창기의 양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만치 사회적인 변혁이 있었고 안정된 환경속에 놓여졌다고 보겠지요. 앞으로는 우리들의 누벨 버그가 아니고 또 다른 누벨 버그가 생겨 나겠죠. 일본의 경우로는 이 누벨 버그 운동을 계기로 해서 많은 발전이 있었고, 많은 신진작가들이 탄생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신진대사랄까요. 하여튼 유망한 신인들이 많이 데뷔했고 지금도 나오고 있습니다. 직접 이 운동에 참가했건 안 했건간에 일본 영화계의 판도는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2. 問 : 초창기 누벨 버그 운동을 시도하게 된 동기와 그로 인해 일본 영화계에 기여한 공로는    

 

答 : 제가 영화게에 들어온 것은 이십이세 때입니다. 원래 법률을 공부했습니다만, 1954년도인데 그 무렵만 해도 일본은 지금처럼 부흥하지 못했던 때입니다. 취직을 하기도 어렵고 밥을 먹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영화계란 들어오면 우선 빵 문제는 해결 되었으랬어요. 그래서 뛰어 들었지요. 아마 저와 같은 생각으로 영화계에 투신한 사람들이 누벨 버그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영화가에 투신하고 보니 암담하더군요. 소위 전전파(戰前派)랄까요? 거장이 수두룩하고 조감독들도 몇 년씩, 많으면 십여년씩 제자리에 묵고 있는 판이더군요.

저는 그때 씨나리오를 썼습니다만 도무지 햇볕을 보기란 어려웠어요. 그래서 우리들끼리 「판프레트」 형식의 동인지를 만들면서 활약했죠. 비웃음도 많이 샀습니다. 풋내기들이 영화의 문법도 모르는 주제에 건방지다느니 하면서……. 그래도 꾸준히 그 동인지에다 씨나리오를 발표했고 영화이론을 폈습니다. 이런 써클운동이 계속되자 노장들도 차츰 우리들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노장감독은 청춘물을 다루어도 벌써 그 연출에 진부한 감이 있어습니다. 그 만큼 감각이 다르다는 뜻이죠.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들의 누벨 버그 운동은 이렇게 싹이 텄습니다.

우리들이 일본 영화께에 기여한 공로를 물었습니다마는, 공로라면 맨처음에도 말했듯이 시대조류에 따라 새로운 풍조를 일으켰고 그 풍조로 인해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입니다.     


3. 問 : 그 무렵의 일본 영화계의 양상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答 : 철저한 멜로드라마의 전성기였습니다. 울고 짜는 신파물들이었죠. 가난한 「히로」와 「히로인」이 울고 불고하다가 헤어지고 만나는 그런 통속적인 얘기들이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가난하고 못사는것도 모두 자기들 탓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잘 살고 못사는 것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렵 즉 제가 데뷔할 무렵 일본 영화계는 TV의 공세를 받기 시작할 때 였습니다.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이 TV의 위협을 받겠습니다마는…, 우리는 그때 TV의 위협에서부터 그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TV에서 텃치못하는 것을 찍어내야 했으니까요.     


4. 問 : 우리가 알기에는 불란서의 누벨 버그란 어떤 테크닉면에서의 신풍을 불러 일으킨데 반하여 일본의 누벨 버그는 테마에 의한 신풍을 일으킨 것으로 아는데?     


答 : 그렇게 보아주신다면 고맙습니다. 물론 일본의 누벨 버그도 테크닉에 의한 변혁은 농후했다고 보겠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와이드 스크린」이 등장한 뒤가 아닙니까? 예를 들자면 전전파 감독들은 「와이드 스크린」이라니까 무조건 넓직한 화면속에 많은 소도구를 진열해 놓고 원경을 잡는 거예요.

화면이 넓으니까 원경을 잡나느 얘기에는 수긍이 가질 않더군요. 가령 널따란 방안에서 주인공이 심각하게 서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원경으로 잡느니 보다는 근경으로 잡아가지고 주인공이 움직이는 대로 카메라가 따라가며 포촉(포착의 오기로 보인다-나)하는 테크닉 같은 것을 시도했습니다.

「와이드 스크린」이면 「와이드 스크린」대로의 맛이 있을게 아닙니까. 그들은 말하기를 널따란 화면에 인물을 근경으로 잡는다면 근 ᅟ걻은 배경(방안)을 카메라는 담을 수 없는 게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그러니까 주인공을 걷게 한다. 주인공이 걸으면 배경(벽)도 자연히 「판(pan-나)」이 될께고 그러면 방안이 넓다는 것이 암시되지 않느냐고 주장했죠. 이건 지엽적인 예입니다마는 테크닉에 대한 변혁도 있었다고 봅니다.    

 

5. 問 : 요즈음 일본에서는 어떤 형의 영화가 붐을 이루고 있는가?     


 : 멜로드라마, 액숀물, 청춘물이 가고 요즈음은 쎅스영화가 붐이더군요. 쎅스영화라는 것은 이제 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이라고 생각되요. 아까도 잠간 얘기했듯이 영화란 TV에서 손을 대지 못하는데에 카메라를 들이대야 할 것으로 압니다. TV는 라디오와 같이 집집이 다 있습니다. 그 TV는 어른에서 아이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서 보는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스펙타클」한 것이나 쎅스물이 아니고는 TV에 먹히고 말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쎅스영화가 붐을 일으킬 수밖에…. 오늘 《총각 김치》란 영화를 구경했습니다. 물론 대사를 모르니까 내용을 자세히 파악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감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영화란 움직임만으로도 알 수 있다는게 특징이 아닙니까? 퍽 재미있게 보았어요. 그런데 이런 영화는 일본에선 어림도 없습니다. 그 정도라면 TV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영화거든요. 다행히 한국에서는 아직 TV의 위협을 받지 않으니까 다행입니다 마는, 《총각 김치》얘긴데 거기나오는 신성일(新星一)이란 스타는 요즈음 굉장히 인기가 있는 모양이더군요.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김희갑(金喜甲)씨. 그 배우는 굉장히 웃기더군요.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상옥(申相玉)감독의 호의로 《쌀》도 보았습니다.1) 아주 좋게 보았습니다. 이건 에치퀫트(에티켓-나)가 아닙니다.     


6. 問 : 귀하는 작품을 만들 때 관객을 계산에 넣고 만드는가?      


答 : 물론 관객을 신중히 계산하고 영화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제나 「이메지」를 낮추지는 안습니다. 매우 어려운 질문이어서 선 듯 대답을 해 놓고도 개운치가 않습니다.     


7. 問 : 순서가 좀 뒤 바뀐 것 같은데 한국에 와서 느낀 소감은?      


答 : 네 아주 반가웠습니다. 원래 저는 친한파(親韓派)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처음 밟아보는 이국땅이었지만 조금도 낯설지가 않았으니까요….

여기 와서 우선 느낀 소감은 모두들 아주 검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무언가 하려는 노력과 의욕이 보였습니다. 일본에서 흔히들 알기론 태만하고 게으른 국민으로 알고있는 데 여기와서 직접보고는 아주 놀랬습니다. 남방(南方)의 어느나라처럼 게으르고, 태만해서 가난한게 아니라, 전쟁을 겪었고 지금도 전시나 다름없는 환경에 놓였으니까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일본도 전후에는 무척 혼란했으니까요. 이건 그쪽에 가서라도 기회가 있으면 꼭 쓰겠습니다.     


8. 問 : 일본에서 친한파로 알려진 이유는?     


答 : 지난해 8월 16일 NET TV에서 저의 작품 《잊고 있었던 황군》(忘れられた 皇軍/한국에서는 잊혀진 황군으로 알려져 있다-나)이란 다큐멘타리 영화를 방영할 때 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그 작품에 대한 반향은 대단 했었습니다. 내용은 대략 이런 것입니다. 과거 일본 군국주의 시절에 일본에 징병되었다가 팔과 다리를 잃은 십칠명의 한국인 상이군인들 이야깅비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불구가 된 상이용사 들이지만 일본정보부에서는 그들에게 연금은커녕 돌보지도 않고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외국인이라는거죠. 이건 실화입니다. 그들은 한국정부에도 여러번 진정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6.25 때의 상이군경도 아닌 그들에게 보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비참한 생활이란 정말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것입니다. 굉장히 반향이 컸습니다. 일회로 예정되었던 것을 육회까지 끌고 갈 정도였으니깐요. 그때 그 TV를 보고 전국에서 동정의 금품이 날려 들어왔습니다. 불쌍한 그들을 돕자는 거예요. 그때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록 곤궁에 빠져 허덕이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따뜻한 마음씨라고…. 한국인이라고 얕보고 병신이라고 천대하던 그 모순이 문제지 금품의 동정이 아니라고….

그 후 17명 중의 한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장례식 때 저도 참석했었습니다마는….

그 작품으로 해서 여러개의 상도 받았습니다. TV 방송과 TV 비평가상도 그것으로 탔으니까요. 우리들 작가가 다루어야 할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9. 問 : 한국에 오게 된 동기와 체류기간은?     


答 : NET TV에 소개될 역시 다큐멘타리인데 《평화선》입니다.2) 한국에서 본 즉 우리로서는 뒷면에서 본 평화선이지요. 한국의 어민들과 평화선을 주제로 해서 그려 볼 생각입니다.

저번에 부산 마산등지를 「헌팅」했는데 지금 대략 푸롯트(플롯-나)는 서 있습니다. 약 40일간 체류할 생각입니다.     


10. 問 : 한국영화계에 대해서 한 말씀     


答 : 아직 영화도 충분히 못보았고 해서 말 할 수 없습니다.

설령 제가 무슨 애기를 한 대도 의례적인 칭찬이라고 생각할 것이겠고…. 한가지 부러운 것은 한국 감독들의 연령이 평균적으로 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욕이 제작자들에게 어느 정도 견제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호에 지면을 주신다면 꼭 기고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별로 사귄 살마도 없습니다만 일전에 부산에 갔던 때의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제 곁에 앉았든 어느 소년이 저에게 살며시 기대서 쌕쌕거리며 잠자는 것을 보고 퍽 흐뭇했습니다. 그 소년은 필경 제가 일본사람인줄 모르고 저에게 기대고 잤을 겁니다. 저는 그 잠자는 소년의 체온에서 묘한 정을 느꼈어요. 우리들에게 흐르고 있는 피는 일본인 이건 한국인이건 같다는 것을 새삼스러히 느꼈습니다.

일본에 있는 제 친구들은 저의 방한을 무척 부러워 합니다.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곳이면서도 가장 먼 곳이 한국이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어려운 곳에 왔으니 마음껏 한국의 무드에 젖어 보겠습니다.     




옮긴이 주


1). 신상옥은 “일본의 오시마나기사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세상에 이렇게 주제가 강하게 드러나 있는 영화는 처음 봤다’라고 평했다.”고 자서전에 쓴 바 있다.(신상옥, 『난, 영화였다』, 2007) 위 인터뷰는 오시마 나기사가 신상옥의 <쌀>을 흥미로이 본 것이 사실임을 알려준다. 기실 신상옥의 <쌀>이 (그것이 5.16 군사 쿠데타일지라도) 최종적인 ‘혁명’의 순간을 위해 서사를 비축했고 이를 강렬한 육체와 폭포의 이미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오시마 나기사가 <쌀>에 흥미를 느꼈을 확률은 충분해 보인다.          


2) 그러나 오시마 나기사는 <평화선>을 촬영하지 못했다. <평화선>은 한국 정부의 불허로 인해 좌절되었다. <평화선>이 엎어진 후 오시마 나기사가 만든 영화가 바로, <청춘의 비>다. (이영재, 「1965와 1968 사이에서, 두 ‘가난’과 ‘양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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