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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ul 24. 2020

김기영의 연극 활동에 대해서

김기영 이야기


일러두기


* 이 글은 극단 《국립대학극장(國立大學劇場)》의 <악로(惡路)> 공연 리플릿-「국립대학극장 제 일회중앙공연(國立大學劇場 第一回中央公演)」을 중심으로 영화감독 김기영의 연극 활동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국립대학극장 제 일회 중앙공연」 리플릿은 「적선을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을 통해 도와주신 분들 덕분에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의 재주가 약간 담겨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아래 후원자 분들의 것이다.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린다. 후원자는 다음과 같다.(가나다순)


후원자: 금정연, 김민경, 김민철, 문윤기, 민경환, 우상희, 이석범, 이여로, 이준호, 정석원, Coracoid


* 이 글은 본인의 석사학위논문 「김기영 초기영화미학 연구」(2020)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국립대학극장 제 일회중앙공연」 리플릿은 이번 글을 통해 새롭게 소개하게 된 자료로 해당 논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 이 글은 비평이 아니다. 이 글은 한국영화사의 김기영 서술에 대한 서지학적 점검이다.


* 인용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로 옮겼다. 그 외의 인용문 수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


1.


김기영과 그의 영화 <하녀>(1960)는 한국영화사의 예외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1960년 이전까지의 한국영화를 고려하면, 표현주의적인 형식(강한 조명 대비, 과장된 연기)과 성적(性的)인 내용, 김수남이 간명하게 일렀듯 “인간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놓치지 않고 심리주의적 기법으로 파고들어 표현주의적 영상으로 표출”1)한 <하녀>는 분명 예외적인 요소를 품고 있다.


흥미로운 건 기왕의 한국영화사 서술이 <하녀>의 예외성을 해명의 대상으로 역사화하기보다 그 예외성 자체를, 그 예외성을 통해서 <하녀>를 설명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기실 영화감독 김기영은 생전부터 그의 “특이한 창작적 분위기”와 “매스컴 쪽은 물론 같은 영화 종사자들과도 접촉을 꺼리는” 생활습관으로 인해 “베일속의 거장감독”2)으로 불리곤 했다. 그러나 김기영 사후 1990년대 컬트에 탐닉한 일군의 시네필이 그를 ‘한국의 컬트’로 재발견하면서, 김기영을 기이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은 급속히 가속되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컬트 현상의 배후에 “중심이 아닌 외곽으로 시선을 돌려 찾아낸 주변적이고 하위적이어서 매력적인 영화”3)에 대한 열광이 있었던 만큼, 컬트영화의 맥락에서 김기영이 (재)발견된 것은 그의 주변·예외·하위적 특성만 주목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매스컴과 거리를 뒀기에 발생한 자료의 미비, 컬트 현상에서 파생된 독특성 자체에의 상찬은 <하녀>의 예외성을 그 자체로 한국영화사에 기입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김기영 영화의 그로테스크, 마성, 새디스틱과 같은 특성은 모두 “<하녀>에서부터 비롯된 것”4)으로 간주되어 왔는데, <하녀>는 “한국영화사의 돌연변이”5)로 명명되며, 연구자들은 “뜬금없이 등장한 이 영화를 보노라면, 도대체 이 영화의 출처가 어딘가를 심각하게 생각”6)하게 만들어 왔다. 곧 “1960년대 단연 독보적인 스타일과 기법으로 김기영이라는 ‘검은 마성의 감독’의 등장”7)을 알린 작품이 <하녀>임에도 불구하고, <하녀>의 창작 배경 혹은 전조(前兆)는 탐지되지 않은 채 그저 ‘돌연변이’로 땜질되어 온 것이다.


존 루이스 개디스는 역사 서술을 지도 그리기로 비유했다. “새로 발견한 지역의 초기 지도는 대개 빈 곳이 많고, 바다 괴수나 용이 몇몇 그려져 있을 수도 있으며, 해안선을 대충 그려놓은 경우가 많다. 탐험이 진행될수록 지도는 더 구체적이 되고 야수들은 자취를 감춘다.”8) 김기영과 <하녀>에 대한 서술에서 나타나는 돌연변이는, 개디스가 지도 그리기에서 말한 “바다 괴수나 용”과 다르지 않다. 기실 예외, 미스테리, 괴물, 돌연변이와 같은 수사는 해석자가 포섭하지 못한 요소가 여백 또는 과잉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수사는 기왕의 역사 서술이 막다른 벽에 이르렀음을 드러내는 흔적인 동시에, 새로운 역사가가 벽을 넘어서야함을 알려주는 표지다.



2.


① “내(김기영-인용자)가 대학 시절에 연극을 연출한 경험이 많았다는 소문이 나서 미국 문화원에서 일을 해 보라는 제안이 들어 왔다. 나는 그때에 대학 병원에서 월급을 삼천원 받았는데 미국 문화원에서 오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거기에서 하는 일은 문화 영화나 리버티 뉴스의 대본을 쓰고 제작하고 편집하는 일이었다. 그 길로 나는 의사를 그만두고 진해에 있는 미국 문화원 영화 제작소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영화와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영화를 전공한 사람이 드물었다. 나는 미국 문화원에서 영화를 스스로 공부하며 문화 영화와 반공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조감독 생활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영화 감독이 되어 지금까지 스무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9)


② “그 후 연극이 끝나고 사계인사들의 총평이 있었는데 그 때 양에 대한 연기평이 가장 우수하였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필자는 본래부터의 욕망이던 영화에서 기회 있는대로 꼭, 함께 일을 해 보려고 노력한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뜻대로 이루워 지지가 않아 지금까지 몇 해를 본 왔는데, 이번 『下女』에서는 이런 내 소원이 성취된 셈이다.”10)


김기영의 연극 활동은 영화 활동의 전사(前史)다. 1978년-위 인용문 ① 김기영은 연극을 연출한 경험이 많다는 소문 덕에 미국 문화원에서 영화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이후 영화에 대한 교육은 따로 받지 않았다고 일렀다. 1960년-위 인용문 ② 김기영은 연극 연출 당시를 회고하며 영화야말로 그의, “본래부터의 욕망”이라고 일렀다. 이처럼 김기영에게 연극 활동은, 그가 영화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기반 경험(①)인 동시에, 영화 활동을 예비한 준비운동(②)이었다. 김기영의 대학 후배이자, 수편의 영화를 함께한 촬영감독 정일성 또한 김기영의 연극 활동이 “영화작업에도 그대로”11) 이어졌으며, “연극과 영화. 연극이 갖고 있는 장점, 영화가 갖고 있는 단점을 연극을 통해서 더 많이 진화시킬 수 없나를 노력한 그런 감독”12)이라 평가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기영을 소개하는 논자들은 그의 연극 활동을 짧게나마 서술해왔다. 이를테면 이연호는 김기영 감독에 대한 단행본 『전설의 낙인』에서 “(김기영은-인용자) 연극반 활동을 통해 그동안 억제해왔던 예술적 재능을 폭발시켰다. 서울대의 ‘국립대학극장’을 이끌면서 그가 연출한 입센의 <유령>이나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햄릿>등은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13)고 일렀는데, 이와 같은 서술은 김기영을 소개하는 이효인, 김영진 등 다른 논자의 글에서도 반복 된다. 이어 이연호는 『전설의 낙인』 출간 이듬해, 2008년 김기영이 연출한 희곡이 “셰익스피어의 정극이거나 스트린드베리와 입센의 자연주의 작품”이었으며, 이러한 점이 그가 1950-1953년 USIS 소속 기록영화를 촬영할 때 “사실적 객관성”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추측했다.14)


그러나 김기영이 연출한 희곡이 어떤 작품이었는지를 확인하는 데서, 탐험을 끝내서는 안 된다. 앞서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김기영은 ‘연극 연출가’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지금껏, 어떤 논자도 살펴보지 않았지만) 탐구되어야 할 것은 김기영이 해당 희곡들을 어떻게 연출하였는지, 곧 실연 양상이다.



3.


「서울대 연극 30년」, 『대학신문』, 1977.09.26 에 수록된 사진.


위의 사진은 김기영이 연출을 맡은 《국립대학극장(國立大學劇場)》 창립공연 <악로(惡路)>의 공연 사진이다. 이 사진은 김기영의 아내 김유봉(金有鳳)씨가 서울대학신문(『대학신문』)에 제공한 사진으로 김기영의 연극이 실제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위 무대 사진을 체호프의 희곡 「악로」에 수록된 무대 지시문과 비교하며 살펴보자. 희곡 「악로」의 무대 지시문은 다음과 같다.


“무대는 티혼의 선술집이다. 오른쪽에는 술병이 놓인 선반과 계산대. 안쪽에는 밖으로 통하는 문. 그 위에 기름투성이의 붉은 등불이 밖으로 매달려 있다. 바닥과 벽 옆에 놓인 의자는 순례자와 나그네들로 초만원이다. 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앉은 채 자고 있다. 한 밤중. 막이 오르면 천둥소리가 들리고, 문을 통해 번개 치는 것이 보인다.”15)


무대지시문에 “기름투성이”와 같은 세밀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듯, 체호프는 사실적인 무대를 염두에 두고 「악로」를 집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연 사진에서 파악할 수 있듯, 김기영이 연출한 연극 <악로>를 ‘사실적’이라고 단순 파악하기는 어렵다. 김기영은 《연극문화협회(演劇文化協會)》에서 무대장치 조수 역할을 했으며, 영화평론가 임영에 따르면 “연극할 때부터 세트 디자인을 직접 했었”다.16) <악로>의 무대장치를 눈여겨보면 체호프의 희곡과 이반하는 측면을 찾을 수 있다.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무대는 전체적으로 대각으로 뒤틀려 있으며, 세트는 서로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부조화를 그대로 드러낸다. 사실적인 무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러한 무대 구성을 염두에 두고, 이화삼의 극평(劇評)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이화삼은 <악로>에 대해 “끝으로 간단한 평을 하자면 연출은 성공이다. 셋트는 실패다. 원작이 요구한 건 그런 표현적인 무대는 아니다. 효과를 너머 난용하였다.”17)고 평했다. 즉 <악로>는 비단 무대의 왜곡 부조화 뿐 아니라 효과가 난용(亂用)된 공연으로, 이화삼의 말을 빌리자면 ‘표현적’인 공연으로 연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체호프의 희곡이 양식사적으로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로 여겨지므로, 이화삼의 평을 따라 “원작이 요구”한 연출과 김기영의 연출이 많이 달랐던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국립대학극장과 세부란시의대 예술단의 연합을 계기로 신극운동에 정진하고 있는 각계유지가 참가되어 고려에술좌를 결성하였다는 바 이 크럽은 기왕 「생의 제단」, 「악로」를 발표한 표현파극의 권위로서 동대표는 정택수씨라 한다.18)


기실 1940년대 후반 김기영이 활동한 연극 단체는 “표현파극의 권위”로 평가받았다. 《국립대학극장》과 세브란스 의과대학 예술단이 연합하여 창설한 《고려예술좌》에 대해, 조향은 “서울대학교 연극부의 좌파 아닌 파의 후신인 《고려에술좌》”는 “현대극의 「아방·갈드」로서 발전할 것 같이 뵈었”던 극장이라 평한 바 있다.19) 그러므로 이연호를 따라 김기영이 연출한 희곡이 “셰익스피어의 정극이거나 스트린드베리와 입센의 자연주의 작품”이었다고 하여 그의 연극을 “표현에 대한 자의식”이 부재한 양식으로 연출되었다고 서술할 수는 없다.


김기영은 1947년 《국립대학극장》에서 <악로>를 연출할 때부터 ‘표현주의적’인 연출을 채택해왔다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4.




+) 《국립대학극장》의 지도고문이 유치진(柳致眞)이란 점은 연극사적으로 흥미로우며, 《국립대학극장》과 김기영의 해방 이후 한국에서 사상적 위치를 보여준다.


연출수기 / 의과대학 김기영
상연하고 싶은 작품은 하도 많다. 더구나 근대극을 연구하는 처지에서도 「이프센」극과 애란극(아일랜드-인용자)이 가장 하고 싶었다. 체홉 작품에서도 무대에서 성공한 많은 작품을 제처놓고 불완전한 처녀작을 상연해본다는 것은 공부한다는 입장에서는 의의가 있을지 모르나 일반흥행으로는 대단히 겁나는 일이다. 요행히 이 연출에 조곰이라도 관객이 참을 수 있게 된다면 다른 작품은 두렵지 않을지도 몰은다. 연출이란 일은 막연한 일이다. 연기자의 표현에 의존하는 연극은 연기자가 소인(素人)인 경우 더구나 연기자의 의도가 박약히 보인다. 나의 이번 일은 무대의한 통일을 좀 기획하였을 뿐이고 그 이상이것을 연기자에 요구치 않았다. 그것은 학생의 분일(奔逸-제 마음대로 행동함)한 표현정신을 그대로 두어 학생극이라는 색채를 이저버리지 않을랴는 것이였다! 나는 그대신 각본자체의 구성에 힘을 쓸 수가 있었다. 나의 감각대로 분해하야 다시 마치고 현대극의 여러 기술을 살릴 수 있도록 구성하는 한 편 새로운 방편으로 각본으로 하여금 산문으로 가차히 하는데 노력하였다. 이 방법이 가저온 것은 무대에서 추진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여야 된다는 것이 뚜렷이 되고 확실한 명제를 설정한 모양이다.
그의 선악은 몰으겠지만 장차 착상을 널피여 좀더 결과를 보고싶다. 이번 극이 실험무대인만큼 여러 실패와 공부를 많이하였으면 한다.


앞서 살펴 본 평들은, 김기영이 《국립대학극장》 시절부터 ‘표현주의적’인 연극을 연출해왔음을 보여준다. 이번에 새로이 소개할 수 있게 된 「국립대학극장 제 일회 중앙공연」 리플릿에 담긴 김기영의 연출 수기 또한, 이러한 논지를 강화한다. 김기영은 희곡 「악로」를 자신의 “감각대로 분해”하고 “현대극의 여러 기술을 살릴 수 있도록 구성”했는데, 이 점이 “무대에서 추진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여야 된다는 것이 뚜렷이 되고 확실한 명제를 설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일렀다. 즉 그는 희곡사에서 「악로」에 지정한 양식-사실주의를 의도적으로 거절했고, 결과적으로는 (표현주의의 전신으로 평가되기도 하는)구성주의의 원리를 따랐던 것이다.


연출을 담당한 김군은 그의 푸랑을 이러케 나누어세웟다.
1. 연극을 하는 사람들을 먼저 창조적흥미에 즐기게 할 것.
2. 학생극의 색채를 일치않도록 학생의 표현을 통제하지 않을 것.
3. 각본을 개편하야 산문의 요소를 부각함으로 명제를 확실화시킬 것.
4. 동작과 행동을 역학적으로 구성하야 동감(動感)과 중량감(重量感)을 입체적으로 연출할 것.
5. 무대와 관객 사이에 이러나는 심리적 결항(結抗, 인용자-길항의 오식?)을 과학적으로 계산할 것.
6. 무대기술에 전력을 다하야 아마츄어의 무대를 충실시킬 것.


김기영의 구성주의적 의지는 같은 면에 수록된 이경진의 「『악로』의 신연출」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난다. “4. 동작과 행동을 역학적으로 구성하야 동감과 중량감을 입체적으로 연출할 것, 5. 무대와 관객 사이에 이러나는 심리적 결항을 과학적으로 계산 할 것.”



5.


이후 김기영은 1947년 5월 15일 세브란스 의과 대학 소속 강준상의 <생의 제단>에 무대장치로 참여했다.20) 《고려예술좌》 창설 이전 김기영이 가담한 《학생예술좌》와 《국립대학극장》은 공통적으로 서울대학교 연극부의 전신(前身)으로 소속집단을 바탕으로 하는 단체였다. 이와 달리 <생의 제단>은 김기영의 소속집단이 아닌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주최한 연극이었다. 이로부터 김기영과 <생의 제단>의 각본을 맡은 강준상 사이에 ‘집단’이 아닌 ‘관심’에 의거한 접점을 추정할 수 있다. 한승억에 의하면 강준상은 김기영과 “가장 가까운 시절을 지냈던”21)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강준상은 정신의학 전공의였다. 그는 1957년 6월에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실몬드·후로이드’옹을 기념하는 대심포지움”의 강사로 「「프로이드」의 예술론」을 지면에 발표했고22) 1963년에는 대한정신의학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23) 그러므로 강준상이 전전(戰前) 서울대학교의 정신과 교실에서 공부한 ‘정신의학’의 정체는 프로이드일 확률이 높다. 이러한 측면을 유의하며 아래 인용한 「『유령』을 말하는 좌담회」를 읽을 필요가 있다.24)

△ 사회 먼저 입센의 유령을 선택한 이유는?
△ 김기영 단순히 현대희곡의 창시자의 극을 해보겠다는 마음에서지요. (중략)
△ 사회 김선생님 연출은 언제부터 하셨지요.
△ 김기영 처음은 체홉 작 『악로』입니다.
△ 사회 창작극은 안하셨군요.
△ 김기영 그렇습니다. 창작극은 상업극단에서 할애해볼까 합니다.
△ 사회 무슨 고심담은? 또는 지향이라든지…
△ 강준상 우리는 첫째 학생이니까 그 점은 미리 아실터이고 학과○계른지는 몰라도 심리학적성격배우가 되구 싶어요.
△ 김기영 요새 흔히 보는 영국영화가튼 것을 보면 심리학적지향이 만치 안흘까요. 현대인이 가진 말 못할 이상심리랄까.


김기영은 「유령」이 “現代戱曲의 創始者의 劇”이기에 선택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곧이어 사회자가 지향하는 작품에 대해 물을 때, 강준상은 학과를 거론하며 “心理學的性格俳優”를 이야기하고 김기영은 “心理學的指向”으로 현대인의 말 못할 “異常心理”를 특칭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심리학’에 대한 관심, 그 중에서도 ‘프로이드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김기영과 강준상이 관계를 맺는 접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


해방 이후 표현주의, 구성주의 연극은 종종 학생극단체에 의해 연출되었다.25) 또한 정신의학자 이병윤에 의하면 해방 이후 의대에 정신의학과 연극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26)


그러므로 김기영의 영화 <하녀>에 독특성을 부여하는 ① 표현주의적인 형식과 ② 성적(性的)인 세계관은 그가 연극 활동을 시작한 시기와 장소가 지속된 결과, 곧 더 큰 보편으로 수렴된다. 이제 우리는 해당 시기의 시대정신과, 김기영의 지속을 묻는 것으로 넘어가야 한다.









각주

1) 김수남, 「영화작가 김기영의 표현주의 작품세계 연구」, 『영화연구』 11집, 한국영화학회, 1996, 30쪽

2) 이만재, 「베일속의 巨匠監督 金綺泳」, 『사랑받는 사람들』, 율성사, 1979, 85쪽.

3) 정한석, 「탐닉자의 별자리-1990년대 시네필과 시네필리아의 일면에 관하여」, 『문학동네』 제24권 1호, 문학동네, 2017, 626쪽.

4) 호현찬, 『한국영화 100년』, 문학사상사, 2000, 116쪽.

5) 이효인, 이정하, 『한국영화 씻김』, 열린책들, 1995, 285쪽

6) 이효인 외 공저,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사 공부 1960-1979』, 이채, 2004, 63쪽

7) 정지연, 「하녀」, 『한국영화 100년 : <청춘의 십자로>에서 <피에타>까지』, 한국영상자료원, 2013, 59쪽

8) 존 루이스 개디스, 강규형 역, 『역사의 풍경』, 에코리브르, 2009, 61쪽

9) 김기영, 「털어놓고 하는 말 – 그 많던 애인은 다 어디갔소?」, 『뿌리깊은 나무』, 1978.07, 151쪽

10) 김기영, 「전아한 분위기의 연기-영화 『하녀』를 중심으로」, 『국제영화』, 1960.08, 122쪽.

11) 이연호, 「덧없는 작별인사」, 『KINO』, 1998.03, 24쪽

12) <영화감독 정일성, 김기영 감독과 영화 '화녀'로의 만남>, OBS ENT, 2020.01.29. 방송

13) 이연호, 『전설의 낙인』, 한국영상자료원, 2007, 72쪽

14) 이연호, 「시대가 낳았지만 시대를 넘다」, 『영화천국』, 2008, 15쪽

15) 안톤 체호프, 김규종 역, 『체호프 희곡 전집』, 시공사, 2017, 9쪽

16) 임영, 「野史 韓國映畵- 세트촬영의 大家 金綺泳감독」, 『중앙일보』, 1990.06.17

17) 이화삼, 「「악로」를 보고」, 『경향신문』, 1947.12.14

18)「고려예술좌 창립」, 『경향신문』, 1949.01.15.

19) 조향, 「「소극장」 운동의 필요성」, 『부산일보』, 1955.04.24

20) 「집회」, 『경향신문』, 1947.05.15. ; 연세극예술연구회, 『연세연극사』, 연세극예술연구회, 1981, 53쪽 참조

21) 한승억, 「김기영 감독과 멋」, 『映畫雜誌』 41호, 1967.02. 117쪽

22) 「「후로이드」 심포지움 6月 7日 서울醫大講堂서」, 『경향신문』, 1957.06.19

23) 「전국 가족계획대회 개막」, 『동아일보』, 1963.06.28.

24) 「『유령』을 말하는 좌담회」, 『민주중보』, 1949.04.12.

25) 「학생극 경연관 후기」, 『경향신문』, 1946.10.26

26) 이병윤, 「한국정신의학의 역사적 조명」, 『서울의대정신의학』, 14권 1호, 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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