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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an 28. 2021

<안개마을>의 기상학

  

“남편이 올 수 있는 마지막 날, 오후 다섯 시 막차까지 그냥 지나가 버리자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않고 싶을 정도로 허탈한 심경이었다. 결근이라도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못한 것이 그제야 뼈저리게 후회되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한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중략) 나는 허탈감 못지않게 내 몸을 사로잡는 그 묘한 열기에 취해 거의 몽롱한 기분으로 버스 정류소를 떠났다.”(이문열, 「익명의 섬」, 『익명의 섬』, 민음사, 2016, 236쪽, 이하 「익명의 섬」, (n쪽)과 같이 표기)      


소설 「익명의 섬」의 ‘나’는 남편이 보낸 편지를 받지 못했다. ‘나’는 허탈감과 이상한 열기를 느끼며 버스 정류소를 떠날 뿐이었다. 소설 「익명의 섬」을 영화화한 <안개마을>은 다르다. ‘나’에 해당하는 수옥은 남편에 해당하는 영훈의 편지를 받는다. 영훈이 올 수 있는 마지막 날 막차가 그냥 지나간 후, 수옥이 허탈함에 눈물을 흘리는 그 짧은 사이. 영훈이 보낸 속달 편지가-마치 막차가 떠나기를 기다린 듯, 또 수옥이 허탈감에 거리를 방황할까 집배원을 재촉이라도 한 듯 정확히 제 시간에-도착한다. “미안하다 수옥아. 친구들과 어울려 과음하는 바람에, 앓아누웠지 뭐니. 다음 정식휴가를 얻으면, 그땐 곧장 수옥에게로 달려가겠어.” 「익명의 섬」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안개 마을>에 도착한 속달 편지.    

  

눈에 띌 정도로 제시간에 도착하는 편지. 정성일은 편지를 논의 중점에 두진 않았지만, “그(임권택-인용자)는 편지가 먼저 도착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수옥이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길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고 놓치지 않고 (그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하지는 않았지만) 써두었다. 그렇다. 이상한 논리를 전제해야겠지만 깨철의 수옥 강간 또는 수옥의 깨철과의 정사-깨철·수옥의 섹스는 강간으로 이뤄지지만, 또한 그렇지 않다. 이 글에서는 잠정적으로 ‘수옥·깨철이 섹스를 했다’는 중칭으로 부른다-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장대비가 내려야만했다. 장대비가 내려 ① 수옥이 외딴 창고로 피하고 ② 마을 사람의 이동이 차단될 때 비로소 “뒤 끝 없는” 섹스를 위한 조건이 마련된다.     

 

그리고 비. 비는 수옥이 속달편지를 읽어야만 비로소 내릴 수 있다. 이상한 논리. 비가 내리기 위해서는 수옥이 편지를 읽어야한다.      


2.     


잠깐 우회. 정성일이 “임권택의 독후감”이라 하였듯, <안개마을>은 「익명의 섬」과 서사적으로 근접하다. 그러나 어떤 차이, 연출 당시 과도하게 중요시된 부분 또는 연출 자체 강도 덕에 도드라지게 부각되는 어떤 부분의 차이는, 속달편지가 열어젖힌 <안개마을>의 기상학(氣象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안개마을>에서 근 십 분을 차지하는, 영훈이 올 수 있는 첫째 날 수옥이 영훈을 맞으러 기차역으로 가는 장면으로 돌아가자. 수옥이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안개 마을>에서 처음 보는 눈. 왜 하필 눈이 와야 했을까? 예쁜 화면을 위해서? 앨리슨 모예의 Only You가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수옥으로 분한 정윤희가 빨간 우산을 든 채 설경(雪景)을 거니는 장면은, 속셈이 지나치게 빤할 만큼 예쁘다. 그러나 이 지극히 장식적인 기상-장면은 <안개마을>을 (고전적 의미에서)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날씨는 <안개마을>에 꼭 필요한 요소처럼 느껴진다. 임권택은 <안개마을> 촬영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정성일: <안개마을>은 감독님의 영화중에서도 짧은 시간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한 12일 정도 만에 촬영을 다 끝낸 걸로…
임권택: 원래는 한 20일 정도에 찍어서 영화를 끝내고 들어가서 녹음을 하려고 했는데, 시나리오를 보면 대충 날짜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눈이 와야 되는데, 눈이 안 와서 20일 중에 한 열흘을 좌우간 놀고 보낸 거요. (략)
정성일: 눈 오는 장면은 실제로 수옥이 역에 갔던 장면 이외에는 없는데, <안개마을>에 눈 오는 장면이 그렇게 필요했나요?
임권택: 응 겨울이 필요했었지. 그런데 영화를 이렇게 찍으니까 날씨도 안 도와주는 거예요. 가 참. (웃음) 처음 계획은 한 20일 정도에 다 끝내가지고 올라오자 했는데, 그게 왜 가능하냐면 이 장소에서 딴 데로 튈 일이 없어요. 온전히 그 마을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그 마을 안에서 돌아다니면 됐거든. 또 옛날에 막 속전속결로 찍어본 많은 경험이 있단 말이오. (정성일,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현실문화, 2003, 1권 487-488쪽)     


인터뷰의 익숙한 방향상실? 또는 영화 예술 작용의 영업 비밀을 남겨두기 위한 정성일의 정지? “눈이 오는 장면이 그렇게 필요했나요?”에 대해 정성일이 얻은 답변은 “응. 겨울이 필요했었지” 뿐이다. 눈이 왜 필요했는지, 어떻게 필요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후 덧붙인 촬영 이야기는 질문과 무관하다. 임권택을 빌어 <안개마을>의 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긍정 “응. 겨울(눈)이 필요했었지.”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촬영 일정을 지연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수옥이 영훈으로 향하는 길에 눈은 내리기 시작해야 했다.      

수옥이 편지를 읽자 비가 오고, 영훈을 맞이하러 가자 눈이 내린다. <안개마을>의 기상 작용은 모두 수옥의 행위 직후에 이뤄진다. 개인, 자연이 독립적으로 운행하는 게 아니라, 마치 수옥의 정서가 자연 변화의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3.     


<안개마을>. 소설 「익명의 섬」의 동족부락에는 안개가 끼지 않는다.      


안개, 눈, 비. 마을에 안개가 낄 때 수옥은 깨철(과 그의 그림자)를 본다.


 하늘에 눈이 내릴 때 수옥은 영훈을 기다린다. 비가 올 때 수옥은 깨철과 섹스 한다.     


<안개마을>의 수분은 수옥의 정욕이다.          


4.      


“나는 허탈감 못지않게 내 몸을 사로잡는 그 묘한 열기에 취해 거의 몽롱한 기분으로 버스 정류장을 떠났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소리에 언뜻 정신이 든 것은 버스 정류소와 하숙집의 중간쯤 되는 길에서였다. 이미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었음에도 장대 같은 소낙비가 내렸다.”(「익명의 섬」, 236쪽)      



「익명의 섬」의 비는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소리”와 함께 내린다. 「익명의 섬」의 비는 수옥을 외딴 창고로 피하게 조성되는 강제적 조건이다. <안개마을>은 아니다. 속달 편지를 수옥이 읽고 찢어버리는 쇼트는 먹구름이 끼고 천둥소리가 울리는 쇼트로 이어진다. <안개마을>의 비는 수옥이 외딴 창고로 이동하도록 스스로 조성한 알리바이다.      


영훈을 기다릴 때 하늘에서 내리던 눈은, 속달편지를 읽으면서, 비로 변한다. 눈 → 비. 수옥의 속달편지 읽기는 화살표(→)의 작용을 한다. 이쯤에서 <안개마을>의 가장 강렬한 장면, 동만댁의 분노를 떠올린다. 남편 동만이 마을 창녀 산월과 외도하기 위해 옥수수 밭으로 향하자. 동만댁은 옥수수 밭에 불을 붙인다.     


배신=불

     

공교롭게도 앞의 세 요소는 모두 소설 「익명의 섬」에서 영화 <안개마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추가된 것이다. ⑴ 속달 편지의 도착 ⑵ 기차역에서 내리는 눈 ⑶ 마을에 끼는 안개 ⑷ 동만 가정과 산월, 그리고 불. 이제 나는 앞서 유보했던 결론, 곧 수옥과 깨철의 섹스에 대해 말할 채비를 마쳤다.   수옥은 날씨의 주재자, 동족부락에 도착해 그 정욕을 수분의 성질로 발산한다. 일상의 정욕, 독점 연애, 섹스에 대한 기다림. 그리고 분노는 일련의 얽매임을 모두 녹여버리고, 깨철과 섹스를 할 자리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수옥의 정욕은 기상을 운용하여, 깨철은 수옥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보철로 그 자리에 소환된 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따위로 예견되었던 여성의 신적 기상작용은, <안개마을>에서 실현된다.                    


https://youtu.be/MT0_EKqYj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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