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우의 「나홍진의 자장 안에서 ‘곡성’과 ‘랑종’은 어떻게 다른가」를 읽었다. 오진우는 <랑종>을 “뼈와 살을 다 발라내면 결국 (…) 나홍진의 정신, 즉 세계관”이 남는다고, “시나리오 원안과 각본 그리고 제작을 맡은 나홍진 감독은 (…) 연출을 맡은 반종 피산다니쿤 감독보다 자신의 존재감을 더 표출한다.”며 글을 시작한다.
이러면 안 된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있었나? 많은 평론가가 <랑종>에서 연출자 반종 피산다니쿤을 빼고 말한다. 반종 피산다니쿤이 <셔터>(2004)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현재 태국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인데도 불구하고. 한 영국인 평론가가 이런 문장을 썼다고 생각해보자. “<스토커>(박찬욱, 2013)의 뼈와 살을 다 발라내면 결국, 스콧 형제의 정신, 즉 세계관이 남는다.” 납득할 수 있나요?
반종 피산다니쿤을 괄호 치면서 분석의 정치함에서도 한계가 노정된다. 이를테면 “동양철학에서 귀신鬼神은 고스트Ghost가 아”니므로 “<곡성>에서 (…)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기독교적 이분법에서 탈피하고 (…) 동양적인 귀신을 다룰 여지를 제공 (…) 하지만 (…) 영화는 이러한 여지가 애초에 없다는 듯 선과 악의 대결로 몰고 간다.”고 쓸 때, 오진우는 귀신鬼神을 “하늘과 땅의 묘합으로 존재하다가 죽었을 때 하늘과 땅으로 흩어진다는 것”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지극히 유교적인 관점이다. (그가 빌린 저서는 [중용 인간의 맛]이다. 도올이 참조한 원문은 주자의 “이르러 퍼지는 것은 신이고, 다시 돌아오는 것은 귀이다. 실은 하나일 뿐이다.”일 것 같다.) 태국 종교 문화를 고려하면 전혀 적합하지 않은 전제(동아시아-유교 귀신론)를 기대하고 홀로 실망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영화 해석도 동의하기 어렵다. <랑종>에 선이 보이지 않다고 이야기하지만(꽤 많은 평론가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다른 요란한 죽음에 비해 님의 죽음은 무척 평온하게 연출되었다. 죽음은 악이 아닌가요? 신神을 거명하면서 인간의 세계관을 도덕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
나는 <랑종>이 끝나자마자 쇼박스 주식을 전량 매도했다. 일언반구 가치 없이 보잘 것 없고 후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판은 칭찬보다 훨씬 더 세밀해야 한다. 인터넷, 지면 가릴 것 없이 행해지는 <랑종> 비판들-이를테면 ① 폭력의 외주화로 김기덕, <랑종>을 묶는 글은, 1999년 <낭낙>이 <타이타닉>을 이기며 ‘태국호러영화’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는 점을 또 김기덕과 함께 활동했던 프랑스의 하드코어 감독이 있었음을 전혀 모르는 비윤리적이고 무지한 언사다. ② MR.위가 <랑종>이 “선의 포기를 종용”하므로 “예술의 이름으로” 승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떠든 글은… 됐다...-을 보고 있으면 속이 답답하다. 정말 싫어서, 추방해버리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전제를 착실히 검토하고 논리를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허술한 비판은 옹호자의 긍정적인 믿음을 더 강화 시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