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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Oct 08. 2021

<쌀> 재난 국가

2018년 석사 1학기 때 썼던 과제 용 논문은 신상옥의 <상록수>(1961)와 <쌀>(1963)을 대상으로 했다. 썼을 때부터 선행 연구 「대중 멜로드라마와 개발의 스펙터클」(스티븐 정, 2011)와 큰 차이가 없지 않는가. 단지 같은 결론에 이르지만 사료를 통해 두 영화의 관계 사항을 세세히 분석한 게 아닌가, 하는 지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합당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거기다 「전후 한일의 신체장애영화」(이영재, 『아시아적 신체』, 소명출판, 2020)에 이미 뛰어난-부러운-해석이 실렸기에, 쓴 논문을 수정/게재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모종의 이유로 '시민 사회'와 같은 중간 단위를 고심하며, 그때 쓴 논문의 세세함에도 중요한 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신필름의 역사는 한국영화산업과 정책 역사의 축도"(조준형, 『영화제국신필름』,2009)라면, <상록수>(1961)가 <쌀>(1963)이 되는 그 과정이 곧 시민이 국민으로 대체되는 자리가 아닐까. 정창화가 공개를 거부한 5분의 대화처럼, 그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半아카이빙용으로               


이하는 2018년에 쓴 논문을 필요에 따라 붙인 것이다.(각주는 모두 생략)     




<5.16 혁명 전야>와 <상록수>     


신상옥은 “<상록수>」를 통해서 박정희 대통령과 알게”되었다고 회고하지만 정창화의 회고에 의하면, 신상옥과 군사정권의 만남은 <상록수> 이전, 7월 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정 :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하루는 좀 만나자고 연락이 왔더라구. (중랸) 그래서 갔더니, 김종필 씨하고 민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혁명에 가담했던 장태화 씨, 그 사람은 나중에 서울신문사 사장이 됐지.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고 유현목 감독이 오고, 신상옥 감독이 오고, 시나리오 작가로는 김강윤 씨가 왔어요. 앉아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김종필 씨가 주로 얘길 하는데 “5.16 군사혁명을 우리 국민들한테 곡해가 없도록, 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느냐 하는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다오” 이런 얘기야, (중략) 그때가 7월 말쯤 됐는데, 얘길 듣고 나니까 신상옥 감독이나 유현목이나 ‘얼씨구나 좋다’하는 거지. (중략) 여기에서도 이 기회를 이 친구(신상옥-인용자)는 안 놓쳤어. 그래서 김종필 씨를 끼고 최은희를 앞세워서 안양 촬영소를 신필름으로 만들고 제작비 지원을 받구 그래서 당시에 신필림이 생긴 거야.          


유 : 그때 김종필 씨하고 자주 만날 기회 됐었어요. 왜냐면, 음…나중에 그 서울신문 사장 했던 장, 뭐라는 사람 있는데, 그 사람 주동이 돼서 이 <5.16 혁명 전야>그런 제목이야. 고 과정을 영화화하자는 거지     
조 : 감독님한테 영화화하자고 그래요?     
유 : 아니, 그때 영화인들 한 스무 명 모아놨어. 감독과 평론가. 거기서 감독을 뽑아. 게, 날 지목을 받은 거야. 음…그, 난 그때 조금 무서워서 안 한다고 했다고.     


정창화와 유현목의 ‘5.16 영화화 관련 회의’에 대한 회고는 참여 인원•진행 사항 등에서 불일치하지만, 상호 대질과 공문서를 참조하면 몇 가지 사실 관계를 추릴 수 있다. 첫 번째로, 신상옥이 참석했다는 정창화의 진술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유현목의 기억처럼 스무여 명이 모였다면, 당시 <성춘향>으로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으며, “한국영화의 실험적 선구자”로 칭해진 신상옥이 초청받지 않았을 확률은 낮다.     

두 번째로 회의 일자가 1961년 7월 말 즈음인 것도 사실처럼 보인다. 회고에 의하면 유현목은 <두고 온 산하>를 핑계 삼아, <5.16 혁명 전야> 감독을 고사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1962년 3월 1일 이강천의 감독 아래 개봉하는데, 이는, <두고 온 산하>의 프로덕션 과정에서 감독이 교체되었음을 방증한다. 국방부 정훈국에서 “단군 이래 최고의 현상금”을 걸고 모집했으며, “대규모 전투 장면이나 몹신을 포함”한 시나리오가 <두고 온 산하>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의 제작기간이 짧았을 확률은 낮다. 따라서 유현목이 “<두고 온 산하>를 하기로” 했던 시기가 1961년 7월 말 즈음이라 추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시기는 또한 군사정권이 영화를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하던 시기란 점에서 설득력을 더한다. 군사정권은 군장병을 대상으로 “혁명계몽영화” <혁명특집>을 5월 25일자로 제작하고,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시, 합창, 음악”을 내용으로 한 <혁명찬가>를 7월 5일부터 기획•7월 20일~8월 5일 촬영했다. 이를 맥락화 하면 선전 영화가 군 대상에서 민간 대상으로, 기록 영화에서 단편 뮤지컬 영화로, 곧 선전의 필수요소인 ‘대중성’의 경향을 따라 이행했단 점이 보인다. 따라서 “<5.16 혁명 전야>”가 <혁명 찬가>에 이어 다음 단계-장소로 기획 되고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상옥이 군사정권과 만난 시기가 <상록수> 개봉 이후가 아니라, 이전이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정창화의 회고가 사실에 가깝다면 “신상옥이부터 뭐 김강윤이두 ‘이 통에 좀 뭔가 하면 제 나름대로 도움이 될 거다’ 이렇게 생각”했단 점은 특기할만하다. 김강윤은 <상록수>와 후술할 <쌀>의 각본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록수>가 “지배 권력과 의사와 상관없이 암묵적으로 동조”했다거나, “신상옥의 영화제작 정치학은 정권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상록수> 제작 당시, 신상옥은 군사정권과의 접합을 직접적으로 목적하고 있었다. 임원식의 회고는 신상옥과 군사정권의 접합에 설득력을 더한다.     


임: (옮긴이-김종필과는) 친했고, 또 일본도 한 번 또 갔고, 또 김종필이가 심심하면 오라고 그래가지고 밤중에 고스톱 치고, 그만큼 막연한 사이야. 그러고 서귀포 가서 그림 같이 그리고, 앉아서. 그러니까 “신상옥, 너 뭐하고 싶어?” 안양촬영소 인수하고 싶대. 그 인수하는 거 다 도와주고,. 또 필름 같은 거 필요 없냐? 내가 알기로는 네가필름이라도 촬영을 못 할 때가 있어. 그래, 신 감독은 필요할 때면 들어와. 불이무역을 통해서 그냥 바로 들여와.     


소설 『상록수』가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일제의 역할이 많이 축소된 것도 군사정권과의 접합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조관연은 군사정권이 혁명 공약의 하나로 자유 우방과의 유대 강화를 내걸었으며, 일본은 중요한 자유우방 중 하나라는 점에서, “군사변혁이 일어나고 3개월 후에 개봉되는 <상록수>가 혁명공약의 내용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록수>의 일제 역할 축소를 단순히 ‘시대적 상황’으로 읽기는 곤란한 틈이 있다. 김성환의 지적처럼, 대중의 반일 감정은 ‘5.16 이후’라 할지라도,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상록수>가 ‘추상적인 5.16의 분위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5.16의 정치’에 복무했음을 방증한다. 즉 <상록수>는, 또한 <5.16 혁명 전야>였을지도 모른다.          


대중기획의 기호 : ‘상록수     


박의장은 향토개발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산 “상록수”같은 인물들을 영화화하여 널리 알려야한다고 말하였다. 동계방학을 농촌계몽에 바친 학생들의 운동을 찬양한 박의장은 이들에게 표창장을 주라고 지시했다.(이철우, 2015)     


이철우의 지적처럼 <상록수>는 지배정권을 통해 ‘상록수 정신’으로 전유된다. 그런데 이 ‘상록수(또는 상록수 정신)’라는 기호는 <상록수> 개봉 즈음에 국한되지 않고, 1960년대 전체를 걸쳐 농촌 사업을 모범적으로 수행한 인물을 표상하는 하나의 기호가 된다. 


“농촌계몽과 농촌경제진흥을 위해 헌신 노력한 전국의 산 상록수 18명”의 삶은 1962년 5월 17일부터 5월 21일까지 「살아있는 상록수」를 통해 5회 연재된다. “살아있는 상록수” 18명은 박동혁과 채영신처럼 개간과 계몽에 일생을 바친 사람을 지칭하는데,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사설 「앰프」를 가설”한 사람도 포함되었다. 이는 ‘상록수’가 구체적인 <상록수>의 외연을 넘어서, “농촌 근대화”란 더 큰 차원의 의미를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록수’는, 1964년 《지방행정》의 「상록수공무원의 수기」에서도 기호로 사용된다. ‘상록수 공무원’은 “지방행정공무원가운데 희생적인 감투정신과 불타는 정열로써 이바지한 일선공무원”을 지칭하는데, 공무원의 행위 규범을 지도하는 차원에서 ‘상록수’를 기호로 사용했단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상록수공무원」은 1973년까지 연재되는데, 이 과정에서 ‘상록수’는 반공사상을 포함하는 기호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는 ‘상록수’의 기의가 점차, 농촌 거주•군부정권 이념체화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상록수>의 다시 쓰기: <>     


1961년 7월 5일 기안(起案)된 「선전영화 “혁명찬가 제작의 건」은 <혁명찬가>의 제작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혁명을 찬양하고 새나라의 건설을 상징키 위한 영화이며 널리 일반에게 보급상영키 위한 것” 인용한 제작 취지는, 군사정권이 구상한 선전영화의 모범을 잘 보여준다. 이를 분절 하면, 다음과 같은 선전영화의 조건을 도출할 수 있다. “① 혁명을 찬양, ② 새나라의 건설을 상징, ③ 널리 일반에게 보급상영하기 위함.”

이 글에서는 앞서, <상록수>를 좌절된 <5.16 혁명전야>의 장소를 목적한 신상옥•김강윤의 기획이라 논한 바 있다. 그런데 <상록수>는 선전영화의 조건에 대응하면, ①과 ②에는 관계가 없으며 ③만 성취한, ‘미달된’ 선전영화였다. 영화 <상록수>는 그 자체로, 선전영화였던 것이 아니라 기호 ‘상록수’로 전유될 수 있는 틈을 통해 선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상옥과 김강윤이 다시 합을 맞춘 <쌀>은 선전영화의 조건을 모두 성취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쌀>은 상이군인인 용(신영균)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고향 마을 금산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용의 아버지는 불모지인 마을을 떠나 서울로 가라고 유언하지만, 용은 불모의 땅에 물을 대기 위해 산을 관통하는 구멍을 뚫을 계획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을 모은다. 그러나 용의 계획은 지방관청 공무원의 부패와 마을 지주인 송의원의 훼방 때문에 순탄치 못하다. 송의원은 마을 무당까지 매수하며, 산에 터널을 뚫으면 산신령이 노할 것이라며, 용과 용을 따르는 자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을 퍼뜨린다. 한편 송의원의 딸 정희(최은희)는 용이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나, 용은 다리를 다친 이후 정희를 만나길 거부한다. 정희는 송의원이 정략결혼을 시키려 하자 서울로 도망간다. 보조금이 나오지 않고 건배(허장강)를 위시한 친구들이 등을 돌리자, 용의 동생 영란은 오빠를 돕고자 술집으로 간다. 4.19가 일어나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부패가 계속되기는 마찬가지다. 정희는 이후 서울에서 돌아와 용을 돕는다. 그러던 중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고 정부가 용의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자 마침내 굴이 뚫리고 황무지에 물줄기가 쏟아진다.     


 상기한 내용은 군사정권이 제시한 선전영화의 조건에 부응한다. 과거 정권의 무능력과 부패에 난항을 겪었던 사업이 “혁명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마침내 해결되는 서사는 ① 혁명을 찬양”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물줄기가 쏟아지는 이미지는 “② 새나라의 건설을 상징”한다. 그런데 ③, 즉 대중성의 성취는 영화 자체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쌀>의 “멜로드라마적 특징”을 대중성을 목적한 것으로 볼 수는 있겠지만, 당시 이미 많은 수를 차지했던 멜로드라마 장르를 그 자체로, 대중성 확보로 보는 것은 게으른 접근일 것이다.   

  

 <쌀>은 “관람자 숫자만으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본 영화”인 <상록수>를 경유함으로서 대중성을 목적한다. 그런데 <쌀>이 <상록수>를 불러오는 것은 광고를 위한 피상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쌀>은 <상록수>와 이미지•서사 등에서 많은 부분 연속된다. 먼저, 두 작품은 모두 외부인이 농촌에 도착하는 데서 본격적인 서사가 진행된다. “플롯을 우선에 두는 견해에 반대하는 취지로 자신의 영화를 거꾸로 상영하고 싶다고 빈정거렸던” 신상옥은 이를 간명한 이미지로 예시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 이미지는 <상록수>의 상징적 장면이다. 버스 이미지는 <쌀>에서 다시 반복 되는데, <상록수>와 마찬가지로 후속 쇼트가 마을의 현재 상황을 암시한다는 차원에서 서사적으로도 연속적이다. 이러한 이미지와 시퀀스의 연속은 <쌀>의 관객에게 <상록수> 감상 경험을 일으키기 충분했을 것이다.     

 

이미지의 연속은 캐스팅에서도 이어진다. 당대 <상록수>에 출연했던 신영균, 최은희, 허장강은 같은 관계로 <쌀>에서 다시 합을 맞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쌀>에서 허장강이 맡은 배역 이름 역시 건배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상록수>와 <쌀>의 연속이 광고•이미지의 차원을 넘어, 서사에서도 느슨하게 이어지는 느낌을 부여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쌀>이 <상록수>를 ‘다시 씀’으로서, 선전영화의 조건 ③을 목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쌀>은 <상록수>가 미달했던 ‘선전영화’의 기치를 완벽하게 내재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쌀>이 단순히 <상록수>의 ‘다시 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쌀>과 <상록수> 사이의 차이 또는 단절은 어디서 말미암은 것일까.     


<쌀>과 <상록수>의 단절은, <쌀>과 군사정권에 의해 전유된 기호로서 ‘상록수’ 사이의 연속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쌀>은 <상록수>로 대중성을 소구하는 한편, 정권이 요구한 모범적 국민인 ‘상록수’를 형상화하는 곳으로 이행했다.     



<쌀>이 기호-‘상록수’에 토대하고 있단 점은, 위 사진을 통해서도 확실히 명시된다. 박정희가 직접 「살아있는 상록수」 발견을 지시한 것을 고려하면, “모든 국민들이 이처럼 줄기차게 살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진정한 발화자는 군사정권이다. <상록수>와 <쌀>을 가르는 근원적인 차이 역시, 텍스트 내부에 있는 ‘군사정권’의 유무에 관계한다. 군사정권이 텍스트에 내재하지 않는 <상록수>는 민중의 능동성과 힘이 강조되는 반면, <쌀>에서 민중은 수동적이고 무능력하다. 갈등 양상 역시 이에 따라 조정된다. 문제는 “터널을 어떻게 뚫는가?”가 아니라, 지원금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다. 이는 110여분 동안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민중의 구원자로, 5분 만에 모든 것을 해결하는 “혁명정권”이 예비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리(<상록수>의 시민 계몽 운동!)이 바로 국민의 자리로. 시민의 멜로 드라마가 국민의 카타르시스로! 이러한 맥락에서 신상옥이 국가에서 국가로 다시 국가에서 국가로 미끄러지며 이동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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