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대덕FILM영상제에서 발제한 원고다. 원고를 쓰면서 구체적인 부정의 대상들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대전의 영상인 분들을 만나면서, 이 글에서 부정적으로 논한 사례들이 일반화 되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 아무튼 아래 원고의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이미 눈에 띄지만, 오늘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그대로 올려둔다.
(다시) 변방에서: 지역영화로 돌파하기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고, 만들고, 다시 세우고, 망치지 않고, 마음을 관료화시키기를 거부하고, 이해하고, 과정으로서 삶-무엇인가 되어가는 삶-을 살기 위해…” - 파울로 프레이리
1. 변방에서 중심으로
안녕하세요. 발제를 하게 된 금동현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앉아 있으니 강연처럼 느껴지는데, 아시다시피 이건 ‘발제’니깐 모쪼록 제가 마이크를 주도적으로 잡고 시작하는 대화 정도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손을 드시거나, 저기요 같은 말을 하지 않으시고 말씀 해주셔도 괜찮아요. 제가 말을 더하는 것보다는-궁지에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대화를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객석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 질문에 대해서는 조금 더 두서없이 말을 해도 양해가 된다는 점을 통해, 미흡한 준비를 감추려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은 알아요.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에요. 스크립트를 앞질러 요약하자면, 막돼먹은 인간을 환영하자! 이니깐요. 제 논변 자체보다도 이 자리가 막돼먹게 되는 퍼포머티브한 측면이 더 중요할 것도 같고요.
이야기에 앞서 간단한 정의를 할 게요. 이 대화에서 제가 말하는 ‘지역영화’는 ‘지역독립영화’입니다. 그러므로 지역영화는 독립영화의 한 가지 하위 유형으로 일단 설정되는데요. 일단 이 정의를 ‘잠정적으로’ 갖고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제가 직접 겪은, 그러나 조금 극단적인 이야기로 시작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예전 한 SNS를 통해 어떤 지역영화가 후지다고 힐난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코멘트에, 어떤 분이 이런 답글을 다셨어요. “부족한 영화처럼 보여도 지역영화 내부에서는 역할이 있다. 어디 가서 영화 본다고 기웃거리지 마라. 당신 같은 사람이 지역영화를 좀먹는다.” 내부, 기웃거리지 마라, 같은 말이 누설하듯, 이 분도 지역영화에 개입되어 있는, 아마 창작자겠죠? 아무튼 저는 “내부에서는 역할이 있다”는 말을 “기웃거리지 마라”는 말과 함께 사용 하는 게 재밌었어요. 극장에서 버젓이 상영해놓고 관객에게 기웃거리지 말라고 하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마도 지역영화는 열악하기 때문에 악평은 거두고 보호해야 한다, 같은 주장이겠죠? 그런데 저는 이런 주장을 들을 때마다 좀 의아해집니다. 도대체 왜 보호해야 하죠? 아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 같습니다. 상업영화나 서울 제작 독립영화에 비해 지역영화는 창작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 여기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본 문구일 텐데-영화 생태계의 다양화, 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에 문제적인 개념이 바로 이 ‘다양화’입니다. 한때 다양성 영화, 라는 말이 독립영화를 대체하기도 했듯, 지금 독립영화(그리고 그 하위 분과로서 지역영화) 존립 근거로 ‘다양성’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극적이고 정형화된 상업영화에 대비 되는 무해하고 자유로운 독립영화… 같은 이야기를 다들 들어보셨을 거예요. 물론, 이 ‘다양화’는 주로 창작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잠깐 ‘한국독립영화의 흐름’을 일별하면서, ‘다양성’이 언제부터 독립영화와 붙어 사용되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독립영화, 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쓰인 것은 1990년 01월이에요. 민족영화연구소·아리랑·영화공동체·영화마당 우리·우리마당 영화패·한겨레 영화제작소 등 6개 단체가 모여 “비제도권의 현실 속에서 영화운동의 집단적 의미에 의한 독립영화를 지향하면서 ‘한국독립영화협의회’”를 결성한 게, 1990년 01월이거든요. 독협 결성 이전에 비제도권 영화는 ⑴ 민중주체의 예술운동으로서: 민중영화, ⑵ ‘큰 영화’가 다룰 수 없는 근본적인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는: 작은 영화 ⑶ 민족민주운동의 발전에 힘입어 영화운동 내의 자기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민족영화, 등으로 불렸습니다. 간략하게 덧붙인 설명에서 아실 수 있듯, 이들은 모두 ‘영화운동’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즉 1980년대 민족민중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들의 계급적 정서와 과학적 세계관을 풍부한 영화예술로 구현”하는, 제도와 영합하기를 거부하는 의지적 표현이 바로 ‘독립’이었던 것입니다.1)
(특히 주지할 점은, 이 시기 곧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내내 (그 실상과는 별개로) 한국영화가 제도권의 3S 정책에 부응해 ‘외설’에 집착하는 영화로 평가받았다는 점입니다. 가령, 그 시대를 지나온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이렇게 썼습니다. “상영되고 있지만 보여지지 않는 영화. 보고 있지만 관람되지 않는 영화. 거기 있지만 별다른 주의도 관심도 끌지 못하는, 마치 그것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기듯 스스로를 조야한 교태와 외설의 기호로 장식하는 영화.")2)
그런데 어쩌다 독립영화가 ‘다양성’을 자임하기 시작한 걸까요? 독협 결성 선언문에 사용된 ‘과학적 세계관’은 거칠게 이야기 하자면 다양성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아무튼, 보수적으로 잡아도 1995년에는 이미 ‘다양성’이 독립영화의 주요한 존재 근거가 되었습니다. 1995년 영화잡지 《씨네필》에 실린 「90년대 한국 독립영화의 현실과 고민」이라는 글의 한 단락을 읽어볼게요. “사회가 예전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워지고(굵게: 인용자) 영상매체가 삶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현 시기는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중들과 만날 것을 독립영화에게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독립영화 집단도 충분히 이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독립영화 집단의 대응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루는 소재의 다양함이다.”3)
1990년 ‘영화운동’으로서 독협이, 갑자기 1995년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요 동인은 “사회가 예전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드러워졌다, 라는 표현이 적확하지는 않겠지만, 아시겠지만 1990년대 초반은 한국사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민중운동의 마지막 필사적 저항이었던 1991년 05월 투쟁이 소멸하면서 사회 전반의 운동이 퇴영했습니다. 정치철학자 김항은 1991년을 간단히 이렇게 요약합니다. “열병 같은 5월이 지난 캠퍼스에는 구호들이 난무했다. 그러다가 성난 구호들을 무색하게 만든 여름이 지나갔다. 1991년은 그렇게 가을을 맞이했고, 성난 구호들은 어느덧 냉소적 아포리즘과 차분한 인용에 자리를 내주었다.”4) 이처럼 1991년 이후 한국은 빠르게 변해갔습니다. 소비사회, 대중문화, 포스트모더니즘… 간단하게 말하자면 정치에서 통치로,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화’로.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운동’으로서 독립영화는 사라진 애초의 기조와 완전히 무관한 ‘다양성’의 탈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즉 영화 산업 전체에서 ‘다양성’의 역할을 맡는, 통치 체계 내부로 들어간 거죠.
1980-90년대 독립영화의 흐름을 개괄한 책의 이름인 ‘변방에서 중심으로’처럼, 독립영화는 정치운동의 진지였던 변방에서, 체계 내부 통치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거예요. 그렇다면 이때부터 ‘독립영화’는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는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독립영화전용관과 독립영화전용관에 걸리는 영화들은 국가의 지원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작년에 영상비평플랫폼 《마테리알》에 Cho Cho라는 분이 ‘독립영화제’에 대해 이런 글을 기고했어요. 길지만 조금 생략해서 인용해볼게요.
“근데 이 영화제가... 어디서 독립한 거예요? (중략) 혹시 (생략) 자본에서 독립한 건가? 물으면, 셋방살이라도 꼭 CGV 나 메가박스 같은 멀티플렉스에서만 하잖아요. 그리고 어디 기업 이름 딴 상도 하나쯤은 꼭 있더라고요. (중략) 아 제도나 기관에서 독립했구나! 근데 또 크레딧 보면 꼭 영진위니 어디 영상위니 해서 20분짜리 영화도 예산이 천만 원이 훌쩍 넘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영화관 옆 골목에서 담배 피우는데, 거기 관계자님들이 그러는 거예요. 제작지원 못 받아서 못 찍는다고. 영화 좀 찍고 싶다고. (중략) 그랬더니 거기 옆에 계신 분이. 야 말도 마. 우리도 똑같아. 이게 영화 틀려고 보조금 받는 건지, 보조금 타려고 영화를 트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도대체 어디서 독립한 거지? (중략) 그리고 깨달았어요. 아 독립영화제는 관객으로부터 독립한 거였구나!”5)
영화제를 다녀보신 분은, 익숙한 상황이죠? 결국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애초 ‘독립영화’라고 내걸었던 것-민중:관객 혹은 민족:관객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민중·민족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독립영화 진영은, 어느 순간 관객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창작 생태계’가 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양성’은 관객 공동체가 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창작자들이 직업 보존을 위해 요구하는 것에 가깝죠. 독립영화가 상업영화 이전의 커리어패스처럼 기능하는 것도 이런 일환이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발제 초반에 언급했던, 한 지역 영화인의 “내부에서의 역할” 그리고 “기웃거리지 말라”는 코멘트도 납득이 가네요. 중요한 것은 지역영화의 ‘창작 생태계’를 다양화하는 것이지, 관객이 아니거든요.
(잠깐 논의를 빠져나와 이야기 하자면 독립영화 관객이 상업영화 관객보다 다양한 취향을 갖고 있다는 근거는 없다. ‘독립영화 같다’ 같은 표현이 통용되는 것만 봐도 그러하며, 대부분의 관객이 ‘배우’를 기준으로 영화를 선택하지 않나?)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독립영화’라는 용어를 그 의미가 이미 가 있는 곳 즉 허공으로 날려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2. 중심에서 변방으로
이 발제의 서두에서 저는 독립영화의 하위에 지역영화를 놓았잖아요. 그럼 지역영화라는 개념도 함께 허공으로 날려야할까요? 기실 지역독립영화가 처한 곤경도 위와 비슷하긴 합니다. 지역 관객의 삶을 담은 영화, 라는 문구를 걸지만 실상은 지역관객이 보러 오는 일은 극히 드물죠. 그리고 창작자들도 ‘지역적’인 것 주로 랜드마크를 강박적으로 기입할 뿐-마치 예술에서 지방인재전형을 노리기라도 하는 듯!-이죠. 솔직히 창작자는 그저 영화가 촬영하고 싶은 것인데, 지원을 위해서 그럴듯한 ‘지역영화’라는 개념을 구축한 것, 이라는 게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요? 물론 이러한 욕망은 긍정되어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의 물적 비대칭이 심하기 때문에, 지역민이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건 좋은 거예요. 다만 그것을 섣불리 ‘지역영화’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즉 이 발제의 원래 제목이기도 한데요, 지역의 영화라고 해서 곧바로 ‘지역영화’라는 명명으로 나아가지 말자는 겁니다.
저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독립영화가 ‘이동’했다는 게 착시는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운동에서 방점은 ‘운동’에 있었던 것이지, 영화에 있었던 게 아니죠. 그렇기에 변방에서 중심으로-즉 정치에서 통치로 이동할 때 그 실효성이 우수수 떨어진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독립영화, 달리 말하면 소위 ‘영화공동체’ 즉 영화-시민이 참여하는 ‘독립영화’는 이제야 만들어가기 시작해야 하는 개념이 아닐까요.
그리고 ‘지역영화’야말로 허공으로 날아간 독립영화를 새로이 구축할 수 있는 개념적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0명, 20명 남짓이라도 좋으니, 지역이 갖고 있는 폐쇄성에서 출발해서 그들의 커뮤니티가 ‘독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대안적’ 방식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요? 이러한 ‘대안적’ 공동체를 위해 두 가지 제안을 끝으로 강연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⑴ 기술 장비에 대한 맹목적 욕망을 멈춰야 합니다. 부디 제가 본 일부의 경우였으면 좋겠지만, 카메라의 역량의 용처와 무관하게 ‘좋은 카메라’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측면들이 소위, ‘기술적 완성도’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그러한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큰 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술에 대한 맹목은 촬영 전체 예산의 확대를 요구하고, 결국 자본금을 회수할 수 없을 만큼 거나해집니다. 가령, 2000년대 초반의 ‘십만원 영화제’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독립영화로 합류되기 전, 비제도권 영화의 다른 이름 중 하나였던 ‘작은영화’처럼, ‘작음’이라는 것을 꼭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까요? 동시대의 인디게임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그래픽에 복무하지 않고, 가능한 그래픽과 그에 걸맞은 룩의 영화를 만드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잖아요.
⑵ 영화계의 주인이 창작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실 예술에서 다양성이라는 것의 가치 자체가 옹호할 만한 것이라면, 그때 옹호되어야 하는 것은 다양성의 기반이거나 개념이지, 다양성을 주창하며 만들어진 개체 각각이 아닙니다. C. 티 응우옌은 예술에서 중요한 건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옳은 판단을 내리려 시도하는 활동”에 있다고 했습니다.6) 누군가 판단의 권력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영화의 좋고 나쁨이 작은 광장에서 퍼질 수 있다면, 이로부터 새로운 미학적 변별 자질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이렇다~ 세계는 이렇다~ 같은 주장의 논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심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면, 곧 변방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이때 발생하는 시차는 정말로 ‘지역영화’라고 하는 새로운 미학적 변별 자질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지역은 서울에 비해 상대 우위에 있습니다. 가령 소설 『GV 빌런 고태경』에는 “만약에 우리 헤어지면 나는 영상자료원 갈 거니까 넌 아트시네마 다녀”라는 대사가 있죠. 그러나 대구에서 시네필 연인이 헤어지면? 결국 오오극장에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대전이라면? 아트시네마에서 만날 수 밖에 없겠죠… 아무튼 이처럼, 막다른 골목cul-de-sac은 게임적인 충돌 상황을 야기합니다. 소설가 J.G. 발라드는 “도시의 범죄율이 이동의 자유와 관계 된다”고 이야기 한 적 있습니다.7) 물리적인 폐쇄성은 충돌을 야기하고, 결국 소설 『하이 라이즈』처럼, 과거에 두고 온 인간상을 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1968년 신좌파 대항문화 진영의 대안적 삶을 상기하면서, 그것이 실패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라고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대안 공동체의 실패를 가까이서 목격한 엘렌 윌리스는 그 문제점 중 하나를 공교롭게도 “조급함”이라고 지적했습니다.8)
1) 서울영상집단, 『변방에서 주변으로』, 시각과언어, 1996 40쪽.
2) 허문영 「전조들」, 《문학동네》, 문학동네, 2016, 474쪽.
3)『변방에서 주변으로』, 위의 책, 53쪽에서 재인용.
4) 김항, 『종말론 사무소』, 문학과지성사, 2016, 7쪽.
5) Cho Cho, 「질식자에게」, 《마테리알》, 2020.08. https://ma-te-ri-al.online/19715207 (확인:2021/11/10)
6) C.티 응우옌, 이동휘 역, 「예술은 게임이다: 왜 중요한 건 애쓰는 일인가 」, https://donghwilee.com/14406 (확인: 2021.11.11.)
7) J.G.Ballard, Philippe R. Hupp “Interview with J.G. Ballard”(1975), Extreme Metaphor, Selected Interviews with J.G. Ballard, 1967–2008, HarperCollins Publishers
8) Mark Fisher, “What Is Postcapitalism” Post Capitalist Desire, Repeater, 2021, 4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