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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an 28. 2022

협잡꾼 당신-『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1)

https://ma-te-ri-al.online/19721795

《마테리알》 4호에 쓴 「협잡꾼 당신-『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을 블로그에 옮깁니다.







협잡꾼 당신-『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1)


1. 김기영-한국영화 소사(小史)


1963년 1월, 이영일은 최초의 김기영 감독론 「욕망=검은 피의 마성」을 시작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 영화계에서 괴물이라고 불리워도 좋을 사람의 하나로 나는 김기영 감독을 추천한다. 괴물성은 타고난 그의 천분이고 보면 이제 새삼스레 추천 여부가 없다. 감독론의 대상으로서 생각할 때 가장 정체를 잡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김기영이다.”[1] 김기영 영화의 괴력을 인준하며 한편으로 역사화를 포기하는 레토릭(rhetoric)은 괴짜, 돌연변이 따위로 단어만 변하며 반복되어 왔다. 〈하녀〉를 본 연구자들은 “뜬금없이 등장한 이 영화(〈하녀〉:인용자)를 보노라면, 도대체 이 영화의 출처가 어딘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며[2] 소박한—동시에 문제가 많은—전기(傳記)를 덧댈 뿐이었다. 오랜 기간 김기영은 문턱으로 존재하며 영토를 넓히는, 한국영화사의 변경이었다. 인적 계보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시대 트로이카로 호명되었던 유현목, 신상옥의 문하에서 김호선과 이장호가 일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김기영의 문하에서는? 쉽사리 떠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김기영의 인적 계보로 확인할 수 있는 인물로는 성인연극 〈교수와 여제자〉로 유명한 강철웅이 있다. 강철웅에 대해서는 〈마이 트루스토리〉 6화 ‘나는 매일 여자를 벗긴다-강철웅’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해당 에피소드에는 〈느미〉(1979), 〈수녀〉(1979)의 조감독을 맡은 에로영화 감독 송범근도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육체의 약속〉(1975)을 시작으로 7편의 영화에 주역을 맡은 김정철은 1990년대 ‘에로영화’ 다수를 연출한 감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철웅, 송범근, 김정철 등을 김기영의 은폐된 계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된다. 1983년, 비디오 시장이 열리고, 비디오필리아가 생기기 시작했다. 1991년, 학내 운동권이 쇠락하고 비디오영화제가 그 자리를 채웠다. 1992년, PC통신 영퀴방, 생소한 영화가 게임의 판돈이 된다. 영화잡지 『로드쇼』가 컬트 특집 기사를 냈고, ‘컬트’는 유행어가 되었다. “중심이 아닌 외곽으로 시선을 돌려 찾아낸 주변적이고 하위적이어서 매력적인 영화”, 곧 컬트영화에 대한 열광이 시작되었다.[3] 자연스레 “한국영화에는 컬트가 없냐”하는 질문이 제기되었고, 그 대답으로 김기영의 〈육식동물〉(1984), 〈바보사냥〉(1984)이 영퀴방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동숭아트센터, 부산국제영화제는 흐름을 느끼고, 김기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김기영은 복권되었다.[4] 정한석의 표현을 빌려 “상상의 계보”, 이연호의 표현을 빌려 “김기영 유령”이 (김기영에 팬심을 드러낸) 박찬욱, 봉준호의 영화 등에서 감지되었다. 이에 자연히 김기영은 한국영화사의 변경에서 ‘한국영화’라는 종(種)적 체계를 생산하는, “진정한 ‘한국영화’ 감독”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5]     

김기영은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 한국영화사에 김기영은 예외적이고 고립된,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로 기입되거나, 문화 환경 변화에 따라 우연히 발견된, 완전히 타율적인 존재로 기입되었다. 개개인의 실질적 위치공간은 구조의 타율성과 개인—혹은 하부 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이 교차하며 형성된다. 그러므로 김기영 담론의 양적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누락된 것은 한국 혹은 한국영화라는 구조에 순응/활용하는 김기영의 행위성이다. 불모의 고립지에서 비옥한 중심으로, 그 ‘사이’의 김기영.          


2. 〈이어도〉로 우회하기


여기서 나는 〈이어도〉(1977)를 상기한다.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던 김기영 영화의 인물들과 달리 〈이어도〉는 불임(不任)에 대한 영화다. 생계를 아내에게 맡기며 손실된 남근을 보상하듯, 일을 저지르고 보던 ‘동식(들)’—아내 김유봉에게 생계를 일임한 건 김기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동식(들)’은 또한 김기영이다—의 음경조차 기능을 잃는다. “듣기 싫어, 내게 돈까지 걱정시킬 셈이야?”며 박여인에게 소리 지르며, ‘동식(들)’에 합류하는 천남석의 정충(精蟲)은 (박여인이 월경을 하지 않기에) 수정도, (폐수로 인해 번식장의 전복이 모두 폐사하기에) 착상도 하지 못한다. 불모의 상태와 이어도의 축역—다른 물고기가 사는 섬—에서 ‘돌연변이’ 김기영을 떠올릴 수는 없을까? 천남석의 대사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양식장을 세우고 싶어”를 김기영의 의지로 비약할 수는 없을까? 나는 들린 사람처럼, 논리와 맥락을 무시하며, 〈이어도〉를 한국영화에 ‘김기영적 영화’가 침투되는 과정으로 보기 시작한다. 불임의 섬에서 민자는 결국 아이를 낳는다. 어떻게? ① 천남석에 탐닉한 외지인 선우현과 섹스를 한다. ② 죽은 천남석의 성기에 대못을 박고 시간(屍姦) 한다.     


2.1. 

1957년 이래로 한국의 영화소관부처들은 국제영화제 수상작의 제작사에 실비/외화 수입권을 보상해왔다.[6] 1970년대 TV 수상기 보급 및 외화 방영으로 한국영화의 관객이 부쩍 감소하자, 영화 제작사들은 국제영화제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출품비 4~50만 원씩을 버리면서 끈덕지게 국제영화제에 참가하고 있는 까닭은 입상에 따른 외화 수입 쿼터 보상에 있다.”[7] 당시 금액으로 500만 원에 상당했던 외화 수입 쿼터를 따기 위해, ‘국제영화제용 영화’가 창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용한 기사의 제목처럼 1970년대는 ‘실속 없는 국제영화제 출품 붐’과 함께 시작되었다. 한편, 주목을 요하는 것은 당시 검열을 소관하던 문화공보부가, 국내영화에서 허용되지 않을 수준의 섹스와 액션 표현을 출품용 프린트에 한해 허용했다는 점이다. 한국영화가 외화에 뒤지는 이유를 문화공보부와 영화인이 모두 ‘표현수위의 제한’에서 찾은 결과였다.[8] ① 국제영화제 출품 목적 작품의 ② 검열 완화. 〈반금련〉 검열서류에 적힌 문장, “작품 내용상 국내 상영은 불가하나 외화 획득을 위한 수출은 가능하다는 심사위원회의 의견이 있었음”[9]은 1970년대 영화계의 상황을 정확히 압축하며, 김기영 또한 그 안에 있었다는 당연한—그러나 자주 부인되던—사실을 확증한다.

김기영 필모그래피를 시간 순으로 톺아보면, 1972년을 기점으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인간을 생식기계로 환원하고 ‘유머’의 견지에서 바라보는—그러므로 그의 영화 속 배우들은 내면의 미묘함이 아닌 외면의 과잉을 연기한다—과격한 상상력이라는 토대에, 〈충녀〉(1972)를 계기로 과감한 논리의 삭제, 장르적 도상, 장식적 미쟝센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국제영화제 붐’의 맥락에서, 〈화녀〉(1971)가 시체스 국제 환상영화제(이하 시체스 영화제) 경쟁 목록에 올랐으며 명자로 분한 윤여정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충녀〉의 검열서류에 수록된 「사유서」에는 “〈속 화녀〉(〈충녀〉의 원제: 인용자)는 전작 〈화녀〉가 예술성 및 흥행성을 동시에 지님에 힘입어” 기획되었다는 문장이 있다.[10] 이때 ‘예술성’의 근거가, 시체스 영화제가 아니었을까? 즉 〈충녀〉 제작의 주된 근거로 시체스 영화제의 인정이 작동했으며, 급기야 〈충녀〉를 더욱 ‘시체스적’이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시체스적 영화? 시체스 영화제가 시작한 1968년 소개전(informative section)에는 테렌스 피셔, 신도 카네토, 혼다 이시로, 마리오 바바 등이 초청되었다. 회고전(retrospective section)에는 제임스 웨일, 토드 브라우닝, 로베르트 비네, 프리츠 랑이 초청되었다. 이듬해 1969년 소개전(informative section)에는 마이클 포웰,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그리고 다시 한 번 테렌스 피셔와 혼다 이시로가 초청되었다. ‘시체스적 영화’는, 거명한 감독들을—감독 개인의 특성을 때때로는 거칠게 간과하며—느슨하게 묶으면서 발생하는 공통점에서 도출된다. 어떤 공통성? 불균질한 내러티브, 사실성에 대한 거부, 성과 폭력 표현에 대한 의지. 감독 개개의 역사성이 간과되며 성립되는 ‘시체스적 영화’가 1970년대 김기영 영화를 주조하는 틀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의 검열 서류에 이르러 굳혀진다. “작의: 본 영화사는 ‘시체스’ 환상 공포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과거 수상작을 낸 자연과학을 전공한 김기영 감독으로 하여금 ‘메카폰’을 들게 해서 소기의 목적을 이룩하려고 한다.”[11] 제작사는 애초에 기획했던 작품명 〈나비문신을 가진 여자〉를, 현재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바꾸면서도 그 사유로 “‘나비문신을 가진 여자’의 제명을 영화제 분위기에 맞도록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개제코저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를 든다.[12]

또한 우리가 볼 수 있는—한국영상자료원 vod로 제공되는—대다수 김기영 영화는 한국에서 상영조차 되지 않았다. 〈화녀〉, 〈충녀〉, 〈육체의 약속〉, 〈이어도〉,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의 검열 서류에 따르면 ‘잔인한 장면’ 혹은 ‘성적인 장면’은 대체로 삭제/축약 판정을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만 이야기해보자. 〈충녀〉의 알사탕 섹스 중 “사탕 위의 애무 장면 중 유방노출 장면 및 옷 벗기는 장면 등 지나친 부분, 완전히 옷 벗은 장면”은 화면 삭제 처리되었다.[13] 〈이어도〉의 접시 섹스 장면은 “접시 소리 다 없앨 것” 곧 전면삭제 판정을 받았다.[14] 이러한 맥락에서 1971년 이후, 김기영의 영화가 해외—구체적으로 시체스 영화제—에 의한, 해외를 위한 작품으로 만들어졌다고 보아도, 온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 앞서 ‘시체스적 영화’의 특성을 다시 불러오자. 불균질한 내러티브, 사실성에 대한 거부, 성과 폭력 표현에 대한 의지. 이는 (언제나 잠정적인 합의로 정의되는) B급 영화의 특성과 맞닿는다. 그러므로 박찬욱의 “컬트영화의 대부분이 B무비로 채워져” 있다는 말을 경유하며,[15]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1990년대 김기영 컬트를 구성하는 요인은, 1970년대 김기영의 시체스 영화제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영화 바깥, 해외를 경유하여, 김기영의 영화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1990년대 김기영 컬트를 지나오며 그 영향을 고백해온 (‘New Korean Cinema’로 묶이곤 하는) 감독들의 해외 영화제 진출의 주요 관문이 시체스 영화제였던 점은,[16] 우연이 아니다.     


2.2. 

1986년 11월 24일 한국영상자료원은 〈양산도〉(1955) 필름을 입수했다.[17] 입수한 〈양산도〉 필름에는 마지막 장면이 유실되어 있었다. KMDb가 제공하는 VOD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영화 안에서 사용된 자형(字形)과 다른, ‘깡통장사꾼’[18]이 필름 겉면을 우악스레 긁어 삽입한 것으로 보이는 “끝”자를 마지막으로 영상은 돌연 끊긴다. 1997년, 동숭아트센터 김기영 특별전과 함께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기영은 〈양산도〉의 결말을 메웠다. “옥이는 기어서 무덤에 다가서는 무덤 속에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는 (결말 이전에 죽어 무덤에 묻힌: 인용자) 수동과 옥랑이 둘이 섹스를 하고 하늘로 올라간다.”[19] 〈이어도〉(1977)의 시간(屍姦),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의 부활한 여자와의 섹스처럼, 그가 채운 결말은 ‘김기영’으로부터 우리가 상상해온 요소에 부합한다. 이에 이연호와 허지웅은 김기영의 증언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며 (존재하지 않는) 〈양산도〉의 결말을 ‘김기영적’이라 칭하기도 했다.[20]

하지만 실제 〈양산도〉의 결말이 파격적인 섹스 장면이었을 확률은 극히 낮다. 〈양산도〉 개봉 이듬해인 1956년, 검열당국은 “키쓰 장면”과 “포옹하는 장면”에서조차 “한국의 사회도덕 기준과는 너무도 어긋나는” 파격을 발견, 〈자유부인〉 상영을 불허했다.[21] 〈양산도〉의 내적 논리에서도 섹스는 환등(幻燈) 디졸브를 통한 시간 변화로 암시될 뿐이다. 기실 〈양산도〉 개봉 직후, 영화평론가 허백년은 〈양산도〉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줄였다. “어머니의 칼에 찔려 수동의 묘까지 포복행진을 하여 가 ‘이렇게 되는 것이 좋았어요’ 하고 한마디 하고는 사랑을 천당에서 맺는 이야기이다.”[22] 1950년대 한국영화계라는 좌표를 설정해보면, 김기영의 증언을 사실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증언의 가치를 섣불리 기각하지 말자. 증언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증언의 산출과 유통 과정에서, 우리는 여전히 진실을 들을 수 있다.

“심지어 녹음실 단골식당의 설렁탕 배달하는 아이까지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는 격으로 〈어이쿠? 저건 검열감인데…〉 대사를 고쳐야겠단다. 마치 노래 소리처럼 읊어대는 검열, 검열에 모두가 검열관(?)이고 모두가 검열 노이로제 환자이다.”[23] 김호선이 토로했듯, 검열은 한국 영화 제작/수용의 전제 조건이었다. 여러 차례 프린트가 잘려나간 김기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양산도〉의 결말을 과격함으로 메울 때, 김기영은 검열당국이 부여한 검열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격한 결말을 요구하는 압력도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1990년대 비디오필리아가 김기영에게 탐닉하였던 이유는 그의 예외성, 탈역사성이기 때문이다. 〈양산도〉 결말을 메운 1997년 동숭아트센터 특별전의 인터뷰의 첫 질문은 “한국의 일부 젊은 영화광들이 추앙하는 컬트 감독이 됐다는 걸 아는지”였다.[24]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김기영에 대한 괴이한 일화가 떠돌던 충무로의 복판에서 일찍이 이연호가 소문의 근원이 “김기영 감독은 아닐까라는 의구심”[25]을 품었음을 유념하며, 김기영이 의도적인 거짓말을 했으리라 추론한다. 김기영은 입수된 〈양산도〉 필름의 공백에 가짜 역사를 의도적으로 기입했다. 진실성은 내용의 진위가 아니라, 가짜 역사 그 자체다. 구멍이 숭숭 뚫린 한국영화의 “텅 빈 아카이브”를,[26]김기영은 생산의 계기로 삼는다. 김기영은 아카이브의 구멍 안으로 역사적·실존적 존재로서 ‘김기영’을 밀어넣고, 그 위에 새로운 ‘김기영’을 덧댔다. 비디오필리아의 각본에 부응하기 위해, 실재—그것이 자기 자신일지라도—를 거리낌 없이 죽일 줄 아는 협잡꾼. 자신의 주검에서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폐기해버리는 과격한 상상력, 김기영이 한국영화사의 유일한 영화적 형상—박기형은 〈여고괴담〉 촬영 당시 김기영을 카메오로 출연시키고자 했다. 신연식은 김기영의 촬영 도중 하룻밤을 영화화하고자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3. 스포일러     


“새벽 2시에 달려갔다. 잿더미가 내 키보다 높게 쌓였다.” 아들 동원 씨는 집이 화재로 전소된 후 ‘기이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다 타서 잿더미가 되었는데 비닐에 싸인 문서가 발견되었다. ‘동원아 보거라’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유서였다. “너무 놀랐다. 유서 첫 마디는 ‘내가 이 한옥을 사지 말자고 했는데 네 엄마가 우겨서 샀다’는 책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 다음이 이것이다. ‘내가 공중에 떠서 우리집 마당을 내려다 보는데 아마도 내가 죽은 모양이다. 네(동원 씨)가 마당에 삼발이를 치고 땅을 파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김 감독이 묘사하고 있는 모습이 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던 것이다.[27]     

그러므로 나는 때때로 의심한다. 〈이어도〉의 한 장면, 천남석이 배에서 어둠으로 빨려 들어갈 때. 소설 「이어도」에서 허구와 실제가 교란되며 역설적으로 ‘이어도’의 존재를 방증하는 그 순간. 천남석은 배에서 뛰어내린 걸까, 뛰어내려진 걸까?          


          



[1] 이영일, 「욕망=검은 피의 마성」, 『씨네마』 1963.01, 56~58쪽. 

[2] 이효인 외 공저,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사 공부 1960-1979』, 이채, 2004, 63쪽.

[3] 정한석, 「탐닉자의 별자리-1990년대 시네필과 시네필리아의 일면에 관하여」, 『문학동네』 제24권 1호, 문학동네, 2017, 626쪽.

[4] 「정성일 〈KINO〉 편집장 인터뷰」, 『김기영 감독 홈페이지』, 2001,https://seojae.com/web/etc/kimkiyoung.htm(2020/10/07 확인)

[5] 유운성, 「파편들-한국영화, 스타일을 향한 의지」, 『유령과 파수꾼들』, 미디어버스, 2018, 29쪽. 

[6] 「국산영화 보상제도 변천」, 『한국영화 자료편람: 초창기~1976년』, 영화진흥공사, 1977, 243~245쪽 참조. 

[7] 「실속 없는 국제영화제 출품 붐」, 『동아일보』, 1970.11.26.

[8] 1970년대 영화 검열의 역학에 대해서는 송아름, 「1970년대 한국영화 검열의 역학과 문화정치」,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를 참조했다.

[9]  〈금병매〉의 검열서류 중 「국산극영화 검열 불합격 통보」, 위의 글 74쪽에서 재인용. [10]  〈충녀〉의 검열서류 중 「사유서」. 

[11]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의 검열서류 중 「나비 문신을 가진 여자」. 

[12]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의 검열서류 중 「게재 사유서」. 

[13]  〈충녀〉의 검열서류 중 「영화 검열 의견서」. 

[14]  〈이어도〉의 검열서류 중 「영화 검열 의견서」. 

[15]  박찬욱, 「B무비 영화광들의 맞장뜨기」, 『KINO』, 2001.09, 71쪽. 

[16]  Violeta Kovacsics, Alan Salvado, Made For Sitges? The Reception of The South Korean Thriller in the Spain Through A Case Study of The Sitges Film Festival, L’ATALANTE, 2020. 참조. 

[17]  〈양산도〉 필름 입수일은 한국영상자료원 국내자료 수집팀 황민진 님의 도움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8]  1950년대 극장 상영이 끝나 “비가 줄줄 새”는 (필름에 스크래치가 많이 난) 필름 프린트는 ‘깡통장사 꾼’에 의해 산간벽촌에서 광목천을 스크린 삼아 상영되곤 했다. (강대선, 『한국영화를 말하다: 1950년대 한국영화』, 이채, 2004, 20-21쪽 참조.) 

[19]  김영진, 김기영, 「김기영 미발표 인터뷰」, 1997. 이 인터뷰는 지면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도움으로 열람할 수 있었다. 

[20]  이연호, 『전설의 낙인-영화감독 김기영』, 한국영상자료원, 2007, 72~73쪽 참조. 허지웅, 『망령의 기 억-1960~80년대 한국공포영화』, 한국영상자료원, 2010, 19쪽 참조. 

[21]  「『키쓰』 장면이 말썽/ 영화 『자유부인』도 상영을 불허」, 『동아일보』, 1956.06.09. 

[22]  허백년, 「한국영화의 방향- 「양산도」가 제기하는 문제 (上)」 , 『조선일보』, 1955.11.06. 

[23]  김호선, 「자유의 깃대와 사각이미지의 깃발」, 『월간영화』, 1978.12, 28쪽. 

[24]  김영진, 김기영, 앞의 글. 

[25]  이연호, 앞의 책, 34쪽. 

[26]  김소영, 『근대의 원초경 : 보이지 않는 영화를 보다』, 현실문화연구, 2010, 25쪽. 

[27]  정용인, 「[단독]고 김기영 감독 유작 시나리오 ‘생존자’ 찾았다」, 『경향신문』, 201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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