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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an 28. 2022

어느 부전자의 초상-『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2)


https://colleague.co.kr/forum/view/540174

《콜리그》에 쓴 「어느 부전자의 초상 -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2)」을 블로그에 옮깁니다.





어느 부전자의 초상 -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2)


김기영, 하면 내가 연상하는 이미지는 홀로 선, 헝클어진 머리, 불만 가득한 눈빛: 위 사진의 모습이다. 위 사진은 1981년 가을 충무로에서 육명심이 《예술가의 초상》 연작의 일부로 촬영된 것이다. 육명심은 적절한 장소와 결정적 순간을 찾기 위해 김기영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시간을 끌었던 것 같다. 같은 날 촬영한 다른 사진이 작업실에 앉아 있기도 하거니와, 육명심 스스로 “나는 이 사진을 찍을 때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 수 있을 때까지 끌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1] 그 결과로 육명심은 얼굴을 조금 가리며 퍼져나가는 연기, 벽면에 묻은 얼룩, 앞굽만 조금 걸쳐둔 바닥의 웅덩이, 좌측 조금 갈라진 시멘트와 함께 김기영을 촬영할 수 있었다. 사진 아래 붙인 설명-“김 감독의 영화는 어둡고 칙칙하며 광기까지 발한다. 언젠가 귀신이 나온다는 흉가가 값싸게 매물로 나온 적이 있었다. 다들 꺼리는 그 집을 그는 대뜸 샀다.”[2]에 어울리는 연출이었다. 사진 속 김기영은 신경증적인 표정으로, 칙칙한 곳에서 어둠에 슬쩍 걸쳐져 있다. 물론, 이런 요소는 김기영이 한국영화사에 기입된 방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왼쪽부터 김용진, 김기영, 미상未詳

시나리오 작가 김용진은, 《예술가의 초상》을 찍었던 즈음의 김기영을 촬영한 다른 사진을 소장하고 있었다.[3] 김용진 소장 사진은 《예술가의 초상》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준다. 벽면의 얼룩과 바닥 웅덩이가 만드는 어둠과 담배 연기와 신경질적 표정이 만드는 복잡 미묘함 따위는, 이 사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촬영자 권리 주장의 근거가 되는 소위 ‘예술적’ 조작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도상icon보다는 지표index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이 사진 속 김기영의 모습은 낯설다. 우애롭게 어울리는, 민머리, 밝은 눈매, 깔끔한 정장까지. 《예술가의 초상》과 달리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은 전혀 유통되지 않았다. 이미지 유통의 비대칭은, 사회인 김기영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과 유사하다. 호사가들은 “괴상한 펏션”[4]과 소문난 구두쇠 김기영[5]에 대해서는 떠들지만, “조수를 장가보내기 위해 청첩장을” 돌릴 때 “아주 고급 와이샤스에다 말끔이” 입은,[6] 김용진의 아내 박정희의 유방암 입원비와 그들 딸의 대학 등록금을 전부 지불하는 자선가[7] 김기영은 기억하지 않는다.     

「협잡꾼 당신-『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에 썼듯, 그 비대칭은 부분적으로 김기영 협잡의 결과였다.[8] (김기영과 히치콕의 유사는 영화적 요소보다, 그들의 ‘평판 만들기 Making of Reputation’에서 찾아야한다.) 김기영은 비밀스런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예술가의 초상》의 실재성을 기각한다고, 곧잘 김용진 소장 사진을 적절한 초상으로 승인할 수는 없다. 예술적 기획만큼이나 사회성도 적절한 표정을 짓도록 강제한다. 자연스러움, 연출… 물론 이들은 위태로운 관념이다. 《예술가의 초상》이건, 김용진 소장 사진이건, 또 다른 사진이건, 보편타당한 초상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감히 이야기해보자면…               

      

         

1971년 출판된 『명화수첩』 부록-예술인들의 영화 수상隨想을 담은 「명화수상」에는 김기영의 짧은 글 「여정旅程」이 수록되어 있다. “중학시절 악우惡友의 권고로 극장에서 간 것을 시초로 영화에 속박된 것이 어느덧 일생을 영화에 속박 당하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김기영은 두 편의 영화, 존 포드의 <밀고자 The Informer>(1935)와 데이비드 린의 <서머타임 Summertime>(1955)을 이야기한다.[9] 1959년 존 포드와 김기영의 만남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밀고자>에 관심을 두겠지만, 김기영은 보란 듯 <밀고자>를 극장에서 “처음 본 것”으로 언급하며 지나친다. 「여정」은 김기영이 <서머타임>을 소개/비평하는 글이다. 김기영과 데이비드 린?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우리는 금세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로사노를 만난 캐서린은 분노를 터뜨리고 정신적 피해에 대가를 물라고 한다. 로사노는 대답한다. ‘당신이 이태리에 온 목적이 뭐요. 늙어서 구라파에 재미를 보러 왔지요. 그 목적대로 날 만나 연애를 맛봤으면 그만이지 날 남편까지 삼을 욕심이요, 당신은 정신적 사랑을 나에게 구하고 얻었오. 나머지 육체적 사랑을 맛보시오. 그리고 미국을 돌아가시오’ 이 말에는 또 한 가지의 의미가 숨어 있다. 즉 영국인 감독답게 자기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추한 미국인이여. 구라파문명을 맛보는 데는 조금도 상관없으나 아예 구라파 문명을 정복하겠다든가 구라파를 자기 것으로 하겠다고는 생각마라. 맛 봤으면 돈이나 내고 돌아가라’ 캐서린은 그날 밤 호텔에서 무상으로 이태리 남자에게 몸을 제공하고 울면서 베니스를 떠나갔다. 영화 <여정>은 15년 전 세계가 냉전 속에 허덕이던 때의 산물이기도 하다.”  

             

「여정」은 소위 ‘성실한 독해’ 기준에서 자격미달이다. <서머타임>에서, 로사노는 캐서린이 미국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붙잡는다. 이별을 고한 사람은 캐서린이다. 베니스를 떠나는 날 캐서린은 배웅을 거절했지만, 로사노가 꽃을 들고 플랫폼으로 뒤늦게 뛰어온다. 이미 출발한 기차에서 캐서린은 뛰어오는 로사노에게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린다. 그것이 김기영이 적은 문장 “캐서린은 (…) 무상으로 이태리 남자에게 몸을 제공하고 울면서 베니스를 떠나갔다.”에서 상상되는 눈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글 「여정」에는 스크린에 영사되는 <서머타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로사노의 거짓말 같은) 아주 조금 남아있는 요소를 바탕으로, 김기영은 <서머타임>을 새로이 상상한다.          

<서머타임>은 1956년 03월 한국 개봉했다. 1955년 10월 <양산도> 개봉으로 본격적 상업영화 활동 시작한 이후, 1956년 11월 제작사 ‘김기영프로덕션’ 만들고 차기작 <봉선화> 개봉하기 이전, 김기영은 <서머타임>에서 오직 자기 세계관의 반영만을 보고 있었다. 문명은 힘겨루기로, 연애는 섹스로 환원된다.     

          

내가 의사 출신이고, 인체 해부도 많이 했고, 밖의 부스럼에 약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속을 베어가지고 째는 것이라고. 나는 진실을 보여주려고, 숨은 것을 다 헤쳐 놓고, 해부학적으로 사실과 진실을 보여주려고…               


(지칭하는 많은 용어들, 이를테면 ‘전근대와 근대의 동거’ 따위가 있지만) 1963년 한 평자가 <고려장>의 인간 무리에 붙인 말 “인간 동물원”으로,[10] 김기영의 세계관은 압축된다. 인구조절문제에 대한 회의를 돌연 원시적 인간 무리 간의 투쟁으로 전환하는 <고려장>처럼, 그는 인간성의 전제, 문명의 타당성을 믿지 않았다. “내 영화는 관념적이라던가, 그런 것이 얼마 없죠. 왜냐면 학생시대부터 주의라는 것을 내가 상당히 혐오했으니깐.”[11]               

김기영의 시야는 렌즈 두 장으로 조정된다.               

먼저 프로이드다. 공공연히 프로디안Freud을 자처한 김기영에게, 주의-ism에 대한 불신과 회의는 (일면) 당연하다. 프로이드는 문명을 강요된 타협이자 해소 불가능한 곤경으로 보았다. 인류가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문명을 만들었지만, 그 순간 문명이 불만을 지속시킨다.[12] 김기영 영화에서 계단은-계급의 차이, 신체의 물리적 기형성을 과시하기 전에-문명과 동물성의 근원적 불화가 낙차라는 행위로 물질화 되는 장치다. 사회 개선? 진보? 김기영은 비웃는다.               

다른 배경은 한국전쟁이다. 나는 정성일처럼 <하녀> 해석의 알레고리로 한국전쟁을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전후戰後 좌우익 대립 상태에서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은 성립 불가능한 것이므로 환상의 결과이며 딸의 마비된 다리는 전쟁 참상의 실제로서 서사로 승화되지 못한 잔여라는 우악스런 상상은,[13] 흥미롭긴 하지만 비평의 방법 차원에 이를 필요도 없이 간단히, 사료적 신뢰성 측면-김기영과 친근했던 정진우는 전중戰中에도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에서 기각할 수 있다. 이청준의 전짓불(「소문의 벽」), 박완서의 고개 자꾸만 가로젓는 할머니(「겨울나들이」), 또는 전광용의 이인국(「꺼삐딴 리」), 손창섭의 봉수(「생활적」)처럼, 한국전쟁은 이념의 진정성이 폐사하는 장소였다. 김수용은 김기영의 “영화적 사고나 스토리”의 근원으로 “피난 중 동료직원의 부탁으로 임산부의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식염수의 사용시간이 오버 되어 태아가 해체되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언급한 적 있다.[14] 폭격 그리고 폭발음. 수술등 밝게 비쳐 눈 아픈데 돌연, 태아는 해체된다. 위선적 문명은 수술대 위에서 사망한다. 정성일이 다른 글 「이 기형성, 이 불구성」에서 탁월하게 짚었듯, 김기영은 “마비가 오면서 일어나는 신체 동작의 경련”에서 비애를 느끼지 않는다.[15] 은폐된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의 표면에 한국전쟁의 흔적이 존재한다. <양산도>에서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닭을 촬영하듯, 김기영은 죽어가는 인간을 촬영한다. 그는 너무 가까이 보거나, 너무 멀리 본다.       

        

(물론 이념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부인否認되는 이념성, 또는 자연화된 이념성과 친구 관계를 맺는 것은 우익이다. 김기영의 ‘의도성’을 좌파적으로 독해하는 논자들에게는 애석하겠지만, 김동순金東純은 한국전쟁 이후 의학계의 사상적 배경을 논의하며 김기영이 “대한민국의 아주 우익 쪽”에 속해있다고 회고했다.[16] 또한, 몬도 마카브로Mondo Macabro 출간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서플먼트에서 정진우는 김기영을 “백색주의자”라고 일렀다.)               


               

김기영 영화 속 인물은 냄새를 맡는 일이 없다. 봉준호는 <하녀> 연작에 하나의 요소, 냄새를 더한다. “1호선 냄새”라고 말하는 순간 사회적 실재가 들끓었다면. 김기영 영화에는 그것이 없다.               


               

연구와 비평, 짤막한 소개를 가리지 않고 책의 부제를 따라 ‘김기영 인터뷰集’으로 곧잘 인용되지만, 『24년간의 대화』는 김기영 사후死後 유지형이 그와의 대화를 기억해 옮긴 책이다. 기억 장치도 없이 이뤄진 20여 년의 대화를 인터뷰 형식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유지형은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우연히 충무로에서 만나 자장면을 함께 먹으며 내가 들었던 고귀한 감독님의 역사의 언어들이 고스란히 떠오르고 토씨 하나까지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무슨 기적일까?”[17]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만…               

재밌는 게 있다. 서문 「“24년간의 대화”를 옮기면서」에서 유지형은 김기영이 “너 요즘도 잘 이빨 잘 안 닦지? 그래 이빨 자주 닦지 마”라 말했음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고 썼다. 유지형은 이빨 닦지 마, 를 화두[“영원히 풀 수 없는 화두”]이자, 책 출간 이후 죽은 김기영이 보낼 메시지[“어느 날 나의 이메일에 감독님의 메시지가 뜰지도 모른다. ‘너 이빨 닦지 마 알았지?’”]로 여겼다. 출처가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유지형이 김기영 인터뷰집이라 부제를 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명? 유지형은 “이빨 닦지 마”가 자기에게 화두로 놓여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적, 소명, 화두. 기억의 내면성을 조정하는 외부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김기영이 정말로 이빨을 안 닦았다면? 1985년 01월 08일 《매일경제》의 연예 소식 기사에는 연예계의 남다른 습관, 기벽의 일례로 김기영이 소개되었다. “영화감독 김기영씨는 칫솔질을 잘 안 하기로 유명해 동료 및 집안 식구들로부터 자주 핀잔을 듣는다는 것. 더구나 김 감독은 아내와 딸•사위까지 모두 치과 개업의이며 자신도 서울대 치대 출신이면서 칫솔질을 싫어해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고 있다.” 1985년의 김기영은 1960-70년대 거장巨匠의 위치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될 재발견의 흐름 또한 미래의 일이었다. 1980년대 저널리즘은 김기영을 아우라 없이 읽을 수 있는 거리를 갖고 있었다.                


김기영은 정말로 이빨을 닦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왜?     

          

(속류 프로디안Freudian 김기영이 칫솔을 남근으로 양치질을 오랄 섹스로 상상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한 적 있다. 김기영은 죽은 천남석의 성기를 화면 정중앙에 배치하는 것도 겁내지 않았지만, 오랄 섹스는 암시 밖에 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성매매 첫날 갑자기 입에 트라우마가 생겨 치과에서 입을 아, 벌리는 명자(<충녀>), 또는 하녀 목을 조르는 동식의 두 커트(<하녀>))         

      

한국영화사는 김기영을 기인 또는 괴물 곧 예외적, 자율적 존재로 서술해왔다. 1990년대 김기영이 재발견된 계기 또한, 리얼리즘 일변도 한국영화 사이로 거나하게 발딱 선, 그의 자율적 작가성이었다. 



다만 이빨에 한해서, 그는 좀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양치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중에도 김기영은 아내의 병원: 김유봉 치과의원 명의로 발송하는 연하장에 그림을 그리고 문구를 썼다. 김기영은 아내를 도와야했다. “저야말로 독립영화의 시초가 됩니다. 다른 제작사나 다른 자본가에게 절대 타협하지 않고, 내 용돈을 가지고 내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요.” 김기영은 아내 김유봉에게 용돈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다. 제작사, 자본가로부터는 독립적이었지만, 아내에게 김기영은 종속되었다. 1997년 도쿄 아카사카 국제교류 포럼 회장 <하녀> 상영 후 한 관객은 김기영에게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때 김기영은 “여자에게는 못 당하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18]

극단적으로 요약하면 <하녀> 연작은 남편이 하녀에 대한 성적 방종으로 경제 주권을 갖고 있는 아내를 괴롭히는 이야기다. 박탈당한 가부장의 권리를 애꿎은 방법으로 보상하는 것이다. 김유봉은 김기영의 영화를 5분만 봐도 “버린 돈 생각”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19] 김기영의 영화 제작-경제적 방종은 김유봉을 울린다. 그러므로 도식: 남편-OO-아내. OO을 통해 남편은 아내를 괴롭힌다. 하녀, 영화, 그리고 이빨.     


남편-하녀-아내 : 남편은 하녀에 대한 성적 방종으로 경제 주권 갖고 있는 아내를 괴롭힌다.      

남편-영화-아내 : 김유봉은 김기영 영화를 5분만 봐도 “버린 돈 생각” 하며 울었다고 한다.     

남편-이빨-아내 : 치과의사 아내 뒀지만, 김기영은 양치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고 다닌다.               


김기영이 이빨을 닦지 않고 버티는 장면을 상상한다. 완고하게 입을 다문 김기영이 앉아있다. 누군가. 이빨 닦으세요. 세균 활동은 금세 시작해요. 바로 좀 닦으세요, 수차례 반복한 말이 다시 들린다. 물론 그는 곧 양치할 것이다. 하지만 잠깐 버틸 것이다. 김기영의 작가성은 여기, 잠깐 버티는 순간 존재한다. 거세 직전의 작가성으로.     


어느 부전자의 초상





[1] 육명심, 『예술가의 초상-욱명심 사진집』, 한미사진미술관, 2011, 32쪽.

[2] 육명심, 『육명심』, 열화당, 2011, 72쪽.

[3] 시나리오 작가 김용진에 대한 다큐멘터리 <시나리오를 향한 집념과 열정, 김용진>(2002)에서 발견한 이 사진은 ⑴ 넓게는 김용진의 “신한문예영화사 근무시절” 1978년부터 1991년 사이, ⑵ 좁게는 사진 좌측 김용진의 얼굴이, 그가 <사랑의 뿌리>(1978)로 대종상 각본상 받던 모습과의 유사에서 미루어 1978년부터 1980년대 초반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4] “죤•포오드가 한국에 왔을 때 (중략) 김기영 감독의 괴상한 펏션이 인상에 남는다. 부상한 팔을 붕대로 목에 걸고, 아무렇게나 자란 두발, 와이샤쓰 바람에 고무신을 끌고 나타났다.” (이영일, 『영화개론』, 1965 323쪽)

[5] “김기영 감독 숙소로 가니까 고기 냄새가 확 나요. 그래 이상하다 해서 문을 탁 여니까 거기서 불고기를 꾸어서 먹는 거예요. (중략) 모든 스태프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좋은 영화를 만들자 뭉쳐서 지금도 고생하면서 반찬 없이 밥 먹어도 불평불만 없이 해나가고 있고 설사 불만이 있더라도 내가 커버하면서 이렇게 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하고 일 못 하겠다. 그 길로 보따리 싸서 서울로 올라와 버렸어”(정일성, 이정아 구술채록, 「1960년대 한국영화의 기술과 1970년대 주요 작품들」, 2017)

[6] 한승억, 「김기영 감독의 멋」, 『영화잡지』 41호, 1967.02, 116쪽.

[7] 김수영, <시나리오를 향한 집념과 열정, 김용진>, 2002

[8] 금동현, 「협잡꾼 당신-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마테리알』 4호, 2021, https://ma-te-ri-al.online/19721795

[9] 김기영이 쓴 글 「여정」과 데이비드 린 영화 <여정>의 구분을 위해, 「여정」과 <서머타임>으로 표기했다.

[10] 「高麗葬- 貧困을 사는 엄청난 삶의 形態」,

[11] 김병욱, <영화인 다큐 <김기영 편>>, 컬러, 51분 디자인중심, 1997. 17분 50초. 

[12] 피터 게이, [프로이드 Ⅱ], 교양인, 2016, 348쪽 참조.

[13] 정성일, 「그들은 이층집에 살았다-김기영의 <하녀>」, 『미스테리아』 25호, 2019.

[14] 김수용, 「영화계 사람들 ④ 김기영」, 『영화예술』 6월호, 1990, 118쪽.

[15] 정성일, 「이 불구성, 이 기형성」, 『영화천국』, https://www.kmdb.or.kr/story/177/3647.

[16] 김동순 외, 「한국근대정신의학의 역사적 조명」, 『서울의대정신과학』 14권 1호, 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24쪽.

[17]  이하 『24년간의 대화』 인용은 모두, 유지형, 「“24년 간의 대화”를 옮기면서」, 『24년간의 대화』, 선, 2006. 5-13쪽 참조.

[18] 사토 다다오, 고재운 역, 『(사토 다다오가 보는) 한국영화사와 임권택』, 2000, 한국학술정보, 84쪽, 참조.

[19] 임도경, 「‘변태’를 자처한 한국 컬트 영화의 敎主」,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0100046(2021/06/27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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