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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un 19. 2022

한국영상자료원에 '김기영 컬렉션'으로 참여했다.




“독일의 한 역사가는 불꽃을 대하는 태도로 주석가와 비평가를 구분했다. 비평가는 타오르는 불꽃을 본다. 주석가는 장작과 타고 남은 재를 본다. 김기영에 한해서, 이 구분은 비유가 아니다. 1998년 02월 05일 새벽 03시 김기영은 자택 화재로 숨졌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수첩, 책, 시나리오, 콘티 등 문서들은 장작으로 불길에 합류하거나, 재를 잔뜩 묻히고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김기영의 자료는 실제로 ‘타고 남은 재’가 되었다. 그런데 재를 통해서 불꽃을 볼 수는 없을까? 재가 그저 불꽃처럼 읽힐 수는 없을까?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의 마지막 장면에는 폭격 이후 재와 다름없게 된 시체더미에서, 아로운이 몸을 일으켜 걷는 장면이 있다. 아로운이 걷자 죽은 잿더미는 가능한 삶의 장소가 되고, 국가가 차단한 벽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이 몰아닥친다. 이 인상적인 생(生)의 장면은 시나리오 「현해탄은 알고 있다」 초고에는 인쇄되어 있지 않다. 이 인상적인 결말 장면은 인쇄본에 덧붙어 있는 ‘초고 뒷부분이 너뭐 처참하고 어두어 「해피엔딩」으로 개작해서 영화를 완성시켰다. 다음 면에 기재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육필 원고지 12쪽 부분에 존재한다. 재에서 불꽃이 타오른다. 영화에서도 그리고 사료에서도.”     


한국영상자료원의 ‘김기영 컬렉션’에 참여했다. 위 인용문은 컬렉션 용역을 하던 과정 중에 써둔 메모다. 대구와 파주의 영상자료원 보존원을 오갔던 날들은 고됐지만, 새로운 자료들을 다시 검토하는 과정: 마치 『아카이브 취향』을 머릿속으로 다시 읽는 느낌은 새롭고 즐거웠다. “눈이 해독하는 동안 손은 점점 얼어붙어 간다. (중략) 열람실 책상에 등장할 때는 대개 두툼한 종이 뭉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허리 부분은 가는 끈으로, 아니면 굵은 띠로 묶여 있고, 모서리 부분은 세월에, 아니면 쥐들의 이빨에 갉아 먹혀있다.”(『아카이브 취향』, 7쪽) 그 과정은 정말 ‘아카이브 취향’이라고 할 만큼, 그 자체로 이상한 허덕임과 만족감을 줬다. 자료를 검토하고 재가공해야한다는 데서 허덕임이 온다면, 자료를 검토하지 않고 이대로 배치해둬도 족하겠다는 상상에서 만족감이 왔다. 그 방증으로 나는 위 인용한 메모를 적은 후, 어떠한 메모도 따로 적지 않았다. 물론 해제 원고는 제외하고 말이다.      


https://www.kmdb.or.kr/collectionlist/detail/view?colId=262&isLooked=true#none 

   


해제 원고에서 특히 주의를 기울인 것은 2장에 해당하는 ‘1984-1997년: 김기영의 공백기와 시나리오 「생존자」’다. 이 장에서 나는 김기영에게 온 소장(訴章)과 그가 쓴 수필 「단책의 망령」을 검토하고 유작 시나리오 「생존자」가 취하고 있는 탐색의 내러티브를 통해, 김기영의 말년성(에드워드 사이드의 용어가 아니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 말년성이란, 마치 종이를 접듯이 끝에서 시작으로 향하는, 김기영이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에서 표출해 온 증상—여성에 대한 공포에서 말미암은 폭력성과 그것의 부인을 위해 동원되는 성적 존재로 인간의 환원—들의 기원으로의 회귀와 회귀를 통한 해소다. 그리고 거기에 중첩된 민족과 ‘민족’이라는 기호들까지…      


나는 위 해제 원고를 쓰면서 오랜 기간 김기영의 조연출로 활동했던 강철웅을 인터뷰했다. 강철웅은 김기영이 말년에 「생존자」를 쓸 때도, 졸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감독님이 시나리오 「생존자」를 쓸 때도 그랬는데, 조시면서 쓰셨어요. 앉아서 조시다가 꿈을 꾸면 시나리오를 쓰는 거야. (중략) 우리 스승님이 왜 돌아가셨냐면 가스곤로 부탄으로 밀어 넣는 난로가 있어요. 근데 스승님이 원고지도 그렇고 담배도 툭툭 털고 하니깐, 그게 인화한 거야. 거기서 조신 거고 휴지통에 종이들이 있으니까.”(「김기영의 (후레) 자식들: 강철웅 인터뷰」, 『마테리알』 6호, 21쪽.) 졸면서. 꿈을 꾸면서. 꿈을 통해 과거에 누적된 사건들의 퐁(fonds)으로 향하면서. 그것이 타오르면. 가스난로 옆에서. 시나리오들을 쓰고. 불태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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