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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ul 11. 2022

크낙새 찾아 30년

아카이브

이 포스트는 1977년 07월 발행된 《자유》 10권 6호의 248~255쪽에 실린 이용민의 「크낙새 찾아 30年」을 옮긴 것이다. 독해의 편의를 위해 국한문혼용체인 원문의 한자를 모두 한글로 고쳤다. 다만 쓴웃음을 뜻하는 고소·늙은 새를 뜻하는 노조 등 한글만으로 뜻이 파악되지 않는 경우에는 고소(苦笑) 노조(老鳥) 등 한자를 병기했다. 「크낙새 찾아 30年」을 옮긴 이유는 저자인 이용민에 대한 나의 관심에서 비롯한다. 1950년대 최고의 촬영기사로 꼽혔던 이용민은 다양한 문예적 영화를 연출하다, 후일 1960년대  <살인마>(1965), <목 없는 미녀>(1966) 등 호러영화를 연출했다. 이러한 경로 자체가 흥미로워 식민지 시절 이용민의 영화 활동을 좀 찾아보고자 했지만, 찾을 수 있는 한국어 자료는 없었다. 이에 이용민이 졸업한 니혼대학에 이용민의 학적부를 요구하는 메일도 보내보았지만 거절당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크낙새 찾아 30年」에 이용민은 이러한 문구를 써뒀다. “필자는 해방 전 일본에 거주하면서 『물새들의 생활』, 『자비심조(慈悲心鳥)』, 『어느날의 干潟地』 등 몇 편의 조류생태 영화를 촬영한 바 있었다.” 이는 내가 아는 한 이용민의 식민지 시절 영화 활동을 밝혀주는 유일한 문구다. 이에 해당 부분을 트위터에 포스팅했고, 이하 ‘옮긴이주’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零 الصفر님(@nullte): “흥미가 생겨 찾아보니 이 트윗에서 언급된 작품들은 일본의 조류생태연구가이자 기록영화감독이었던 시모무라 켄지(下村兼史, 1903~67)가 만든 다큐들로 보인다. 이로 보아 이용민 감독이 대학 졸업 후 취직했다는 일본의 영화사는 이 작품들을 제작한 리켄카가쿠에이가(이연과학영화, 理研科学映画)로 추정된다. 이 영화사는 이화학연구소 산하로 주로 교육영화, 과학영화를 제작하던 곳. 아마도 이 감독은 일본의 야생조류사진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시모무라 밑에서 스탭으로 일하며 스스로도 조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시모무라 감독이 여기서 만든 영화의 정확한 제목과 연도-물새의 생활-제1집(水鳥の生活−第一輯−, 1939), 어느 날의 갯벌(或日の干潟, 1940), 자비심조(慈悲心鳥,1942). 자비심조는 3번이나 영화화된 바 있는 키쿠치 칸의 동명소설에서 제목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중 어느 날의 갯벌이 문부대신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고 전전 다큐멘터리의 걸작으로 꼽히며 비교적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캡쳐화면이 있는 블로그 https://blog.goo.ne.jp/sightsong/e/d19b5d6b6d2d50f223e8529c74962af6) 아마 전시상황등을 감안하면(시모무라도 전후에나 활동 재개) 이용민 감독이 '새'라는 작품을 제작해서 수상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유명 수상작에 참여했다는 것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을 듯.”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리켄카가쿠에이가(이연과학영화)의 문서고에서 이용민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크낙새 찾아 30年」에서 이용민은 새의 울음소리를 따라하는 어치에게 속은 것을 이렇게 경험한다. “어치에게 속았으나 나는 희망에 부풀었다. 분명히 크낙새의 생활권에 들어선 것이다. 어치가 귀에 익을만큼 크낙새의 울음소리를 들었기에 흉내를 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근처에 크낙새가 앉을 만한 여러 그루의 나무를 볼 수 있는 적당한 위치를 선정하고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그 곳에 잠복했다.” 이러한 목적을 갖고 있어서이겠지만, 크낙새를 촬영하고자 하는 이용민의 기록은—촬영이 ‘shooting’으로 불리는 이유를 분명히 보여주는 한편—마치 자료를 찾고 실재를 포착하고자 하는 역사의 작업처럼도 읽힌다. 그러므로 아래의 구절은 한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묘한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전과는 달리 크낙새가 「카메라」 회전음에 반응을 보였다. 파던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도 얼른 「카메라」를 멈추었다.

1분쯤 지났을까. 크낙새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나도 다시 「카메라」를 돌렸다. 크낙새는 다시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카메라」를 정지시키고 숨을 죽였다. 크낙새는 내가 숨어있는 약 4「미터」 전방의 나뭇가지에 와서 앉았다. 어찌나 가까이 날아왔던지 펄럭이는 날개 소리가 녹음이 된 것을 후에 알았다.

그리고는 크낙새는 소리 나는 정체를 알아내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위장한 나뭇잎 속에서 숨도 크게 못 쉬고 크낙새를 관찰했다. 가까이서 본 크낙새는 상당히 노조(老鳥)였다. 꼬리도 많이 닳았고 깃도 퇴색해서 초라했다. 발정을 한 탓인지 머리털의 진홍색이 유난히 눈이 부셨다.”    

 

「크낙새 찾아 30年」의 체험은 “제작중의 장편기록영화 『한국의 새』 속에 어떻게 해서든지 크낙새를 수록해야할 절실한 처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새>(이용민, 1972)는 다행히도 한국영상자료원이 원본 필름을 보존하고 있다. 상영된 기록도 없고, 디지털화도 되지 않았지만, 필름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 본문의 크낙새, 그리고 위 인용된 4미터 앞 크낙새의 날개 소리는 담겨있을까?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A/02139






크낙새 찾아 30년

이용민 (영화인, 조류연구가)     


한번도 본 일 없는 암컷

크낙새는 심심치 않게 신문지상이나 화제에 오르내려서 이젠 이 새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가진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크낙새는 이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 한국에서만 볼 수 있다. 아주 희귀한 대형 딱따구리.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97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텃새다.

크낙새는 그 선명한 색채와 크기로 해서 이 새를 한번 본 사람은 좀채로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겨 준다.

크낙새의 수컷은 머리 꼭대기와 뺨이 아주 눈부신 진홍색이다. 목과 가슴, 그리고 날개와 꼬리는 흑색이며, 복부와 배면은 백색으로 우리나라 텃새로는 특이한 색채의 「콘트라스트」를 갖고 있다.

여기에 비해 암컷은 머리 꼭대기와 뺨이 진홍색 털 대신에 검은 털을 하고 있다. 필자도 이 긍을 쓰는 현재까지 암컷을 야외에서 관찰할 기회를 가져 본 일이 없다.

크낙새는 그 크기에 있어서도 딱따구리 왕자의 관록이 충분하다. 부리의 끝에서 꼬리 끝까지의 길이가 46「센티미터」나 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까치와 같은 크기다.

한국산의 제일 작은 쇠딱다구리의 길이가 13「센티미터」, 오색 딱따구리가 23「센티미터」, 큰 오색딱다구리와 청딱다구리가 같은 크기인 25「센티미터」인데 비하면 크낙새는 크기에 있어 월등한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한국산의 희귀종 텃새인 까막딱다구리도 크낙새와 같은 46「센티미터」의 크기이나 크낙새와 다른 점은 뺨에 진홍색 털이 없고 복부가 백색털 대신 검은털로 덮여 있어 그 색채의 화려함에 있어 크낙새에 뒤지는 한편 까막딱다구리는 일본에도 서식하고 있어 우리나라만의 자랑거리는 못된다. 크낙새도 1920년대까지는 일본 대마도에도 서식했었으나지 금은 멸종되어버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일본 정부는 크낙새의 희귀함을 인식하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악덕표본상이나 몰지각한 인간들이 크낙새가 천연기념물로 법의 보호를 받기 전에 마구 잡아 표본을 만들어 고가로 국외에 반출하기도 하고 국내의 표본 수집가의 사유물로 되어버려 크낙새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었을 때는 이미 극소수가 대마도에서도 가장 교통이 불편한 북부원시림에 서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크낙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후에도 한없는 인간의 소유욕에 희생이 되어 지금은 대마도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흥분 자아낸 박제품

필자는 해방 전 일본에 거주하면서 『물새들의 생활』 『자비심조』 『어느 날의 간석지』등 몇 편의 조류생태 영화를 촬영한 바 있었다. 그때부터 기회를 만들어 한국의 크낙새의 생태를 「필름」에 담고자 염원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한채 해방되던 해 4월에 귀국하였다.     


(옮긴이주: 나는 이 부분을 트위터에 포스팅 해, 누군가 일본 자료로 이용민의 생애를 밝혀주길 바랐다. 그 트윗을 본 零 الصفر님(@nullte)이, 위의 제목들을 바탕으로 다음 정보를 알려주셨다. “흥미가 생겨 찾아보니 이 트윗에서 언급된 작품들은 일본의 조류생태연구가이자 기록영화감독이었던 시모무라 켄지(下村兼史, 1903~67)가 만든 다큐들로 보인다. 이로 보아 이용민 감독이 대학 졸업 후 취직했다는 일본의 영화사는 이 작품들을 제작한 리켄카가쿠에이가(이연과학영화, 理研科学映画)로 추정된다. 이 영화사는 이화학연구소 산하로 주로 교육영화, 과학영화를 제작하던 곳. 아마도 이 감독은 일본의 야생조류사진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시모무라 밑에서 스탭으로 일하며 스스로도 조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시모무라 감독이 여기서 만든 영화의 정확한 제목과 연도-물새의 생활-제1집(水鳥の生活−第一輯−, 1939), 어느 날의 갯벌(或日の干潟, 1940), 자비심조(慈悲心鳥,1942). 자비심조는 3번이나 영화화된 바 있는 키쿠치 칸의 동명소설에서 제목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중 어느 날의 갯벌이 문부대신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고 전전 다큐멘터리의 걸작으로 꼽히며 비교적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캡쳐화면이 있는 블로그 https://blog.goo.ne.jp/sightsong/e/d19b5d6b6d2d50f223e8529c74962af6) 아마 전시상황등을 감안하면(시모무라도 전후에나 활동 재개) 이용민 감독이 '새'라는 작품을 제작해서 수상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유명 수상작에 참여했다는 것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을 듯.”)     


그 당시는 여행하기가 여러 가지로 불편한 때였으나 나는 일본에서 갖고 온 든든한 신분증 덕분으로 비교적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어 몇 차례 경기도 광릉으로 크낙새를 찾으러 갔었다.

3~4일씩 민박을 하며 혼자서 숲속을 헤맸다. 멀리서 크낙새가 나무를 쪼는 우렁찬 소리를 듣고 가슴을 설레며 접근해 보았으나 내가 크낙새를 발견하기 전에 크낙새가 먼저 나를 경계하고 날아가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무를 쪼아대는 위치와 시간 간격, 그리고 울음소리 등으로 판단해서 암수의 구별은 모르겠으나 최대한 3마리 정도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제 너희들 크낙새를 촬영하는 것은 시간문제다』라고 혼자 미소를 지으며 망원「렌즈」에 잡히는 크낙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으나 그렇게 간단하게 여겼던 시간문제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27년후에야 성취되리라고는 그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해방이 되던 해 9월 초순경 나는 뜻하지 않게 지금의 서울 충무로 거리에서 크낙새와 첫대면을 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못 가져간 잡동사니 물건을 파는 노점에서 아주 완전한 크낙새 수컷의 박제표본을 발견하고 놀라서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10년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것보다 더 반가웠다.

지금이나 예나 호주머니 속이 가벼웠던 나는 노점 주인이 나의 마음을 눈치 채고 고가를 홋가할까 두려워 흥분을 가라앉히고 최대한으로 아무 흥미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 값을 물어보았다.

나의 일생일대의 연기의 덕분이라기보다는 크낙새의 표본은 노점주인의 관심밖에 물건인냥 아주 헐값을 불러서 두 번 나를 놀라게 했다. 그 값은 지금 잊어버렸으나 주인의 태도로 보아 깎으면 더 깎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떨리는 손으로 돈을 내주고 허공에 뜬 발걸음으로 그 표본을 소중히 안고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표본은 항상 내 옆에 소중히 간직되어 오다 6.26때 피난 길에서 돌아와 보니 분실되어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왔으면 현재 창경원 표본실에 진열되어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완전한 상태였을텐데… 눈앞에 그 모습이 선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저 소리가 무얼까

1971년 4월 5일, 광릉 골짜기에는 그때까지도 얼음이 녹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날도 크낙새를 찾고 있었다.

제작중의 장편기록영화 『한국의 새』 속에 어떻게 해서든지 크낙새를 수록해야할 절실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크낙새 찾는 걸 알기쉽게 설명하면 서울 남산공원에 올라가 남대문에서 중앙청 쪽을 바라다본 넓이의 울창한 숲속에서 경계심이 강하고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새를 찾아내는 것과 같은 막연하고 고달픈 일이다. 이게 광릉 숲속에서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 나의 일과였다.

차츰 추적하는 범위가 좁아졌다. 어렴풋이나마 크낙새가 활동하는 「코스」를 알아낸 것이다.

사람도 자기 생활의 필요에 따라 매일 일정한 「코스」를 왕래하듯이 새들도 넓은 숲속이라고 무작정 아무데나 날아다니지는 않는다.

직업적으로 곤충을 채집하는 사람들이 산에서 나비를 잡을 때 그들이 「접도(蝶道)」라고 부르는 나비가 날아다니는 길을 발견하면 한 장소에 앉아서 많은 나비를 채집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접도란 나비들이 좋아하는 꽃을 따라 꿀을 찾아다니는 일정한 「코스」다.

크낙새도 먹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아름드리 밤나무에서 크낙새가 애벌레를 파먹은 구멍을 여러 장소에서 찾아냈다.

장구(長久)한 시간을 두고 애벌레만 파먹고 살아온 크낙새의 습성은 그 애벌레를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눈에 안 보이는 끈으로 벌레를 구할 수 있는 장소에 묶여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4월 5일 오전 10시쯤. 나는 광릉의 릉 건너편 소리봉 중턱에 있었다.

『클락!』 『클락!』 분명히 크낙새의 울음소리다. 그러나 순간 직감에 좀 이상하다고는 느꼈었다.

내가 서 있는 근처에서 들려 왔다. 긴장한 나는 풀숲에 몸을 숨기고 쌍안경을 가지고 소리나는 방향을 찾아보았다. 잣나무 가지에 크낙새가 아닌 어치가 크낙새의 울음소리를 흉내내고 있었다. 어치는 곧잘 자기 주변의 새들의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야조(野鳥)에 대한 지식이 초보인 때는 물론 상당히 숙달된 지금도 종종 어치에게 속아서 고소(苦笑)할 때가 많다. 크낙새는 울음소리가 많지 않은 새다. 봄에서 여름까지 새들이 번식기를 맞아 가장 잘 우는 기간 중에 크낙새가 활동하는 환경 속에서 몇 달을 지내도 크낙새의 울음소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듣기가 어렵다. 이것도 크낙새를 발견하기 힘든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감전한 사람처럼

어치에게 속았으나 나는 희망에 부풀었다. 분명히 크낙새의 생활권에 들어선 것이다. 어치가 귀에 익을만큼 크낙새의 울음소리를 들었기에 흉내를 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근처에 크낙새가 앉을 만한 여러 그루의 나무를 볼 수 있는 적당한 위치를 선정하고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그 곳에 잠복했다. 말벗이 있으면 주의력을 산만시킬 우려가 있다. 외로와도 혼자 기다리는 게 좋다. 나는 마침 담배를 안 피워서 잘 되었지만 담배 연기는 아주 금물이다.

몸이 괴롭다고 함부로 부석거리지도 못한다. 새들은 언제나 예고없이 나타날 때가 많으니까….

촬영준비가 갖추어지면 언제나 긴장해—「카메라」에 망원장치를 하고 이렇게 몇해를 기다렸는지……—서 주어진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노란턱멧새의 수놈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연가를 부른다. 조용히 「테이프」 녹음기의 「스위치」를 눌러 소리를 땄다. 이게 그날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잠복한 수확의 전부였다.

다음 4월 6일도 허탕이었다.

4월 7일도 같은 장소에서 기다렸다.

오전 11시경이었다. 어디선인가 굵은 쇠못을 쇠망치로 판자에 두드려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릉임업시험장 직원이 무슨 표시판을 나무에 박나 생각하고 방해자의 출현에 혀를 찼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 봐도 사람의 말소리나 발자국 소리는 안 들린다.

『무슨 필요가 있어 한곳에 저렇게 여러 개의 못을 박을까?』 문득 나는 감전된 사람처럼 놀랐다. 저것은 크낙새가 애벌레를 파는 소리가 아닌가! 5분, 10분 시간이 갈수록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쌍안경으로 눈이 아프도록 찾아 보아도 크낙새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그때의 위치를 떠나서 접근해본다는 것은 들새의 생태영화나 사진을 촬영하겠다는 사람이 가져서는 아니될 조급한 태도다. 그것은 새를 놀라게 해서 멀리 쫓아보내고 다음에 자기 앞에 올 「찬스」를 스스로 막아버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애벌레를 파먹는 소리가 높고 얕게 30분간이나 계속되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끝내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아나는 기어이 보았다.

그날도 허탕인가 싶었다. 깊은 공허감과 좌절감에 빠지려는 자신을 간신히 가누었다. 2시 30분경이었다. 무심코 나의 왼쪽 약 40「미터」 전방의 밤나무를 보았다. 저게 무언가? 나는 순간 나의 눈을 의심했다. 아아, 크낙새! 바로 다름아닌 크낙새였다. 언제 날아왔는지 분홍색 머리털도 선명한 크낙새가 나무줄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냉정을 되찾으려고 심호흡을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촬영기의 망원「렌즈」는 크낙새를 향해 우측으로 30도 각도를 노리고 있었으나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극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서서히 크낙새를 향해 「렌즈」를 돌렸다. 크낙새는 소리도 없이 날아가버렸다. 움직이는 망원「렌즈」에 의심을 품었는지 혹은 그 자리에 아무 용건(?)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무정한 새다. 금방 맥이 탁 풀린다. 그래도 다시 기운을 내서 혹시나 하고 쌍안경을 가지고 주위를 살피니까 까맣게 저 멀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망원「렌즈」로 초점을 맞추어보니 1백 20「미터」의 거리다.

중간의 마른나무 가지들이 겹쳐져서 초점 맞추기도 곤란하고 또 찍어보았자 초점이 선명한 화면을 기대하기 어려우나 무작정 「카메라」를 돌렸다. 좀 과장한다면 역사적인 순간이라고도 하겠다. 그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 귀중한 크낙새가 「필름」에 담겨지는 까닭이다.



크낙새는 수직으로 나무에 붙어 있다가 2~3분 내지 5분 간격으로 『두루루루루룩』하고 나무줄기를 쪼아댔다.

앉아있는 그 자리에서 때릴 때도 있고 1「미터」내외 노핑로 기어 올라가서 쪼아대고 다시 뒷걸음으로 먼저 위치로 내려오기도 했다. 그리고는 몸 속의 이를 잡는지 그 긴 부리로 털속을 긁어댔다.

『두루루루루룩』 쪼아 대는 소리는 조용 아침에는 2「킬로미터」 밖에서 들을 수 있는 아주 우렁찬 소리다.

크낙새를 위시해서 딱따구리 종류가 나무를 쪼아대는 것은 그 속의 애벌레를 잡아 먹기 위한 것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전부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애벌레를 찾기 위한 경우는 뒤에 쓰겠으나 나무 줄기를 쪼아대는 대부분의 동기는 일정한 넓이의 자기 세력권을 동료에 알리는 신호인 것을 오랜 관찰에서 알 수 있었다.

자기의 힘을 과시해서 충돌을 사전에 막고 평화공존을 해보자는 신호인 것이다.

인간사회나 매한가지로 식량문제 때문인 것 같다.

자기 세력권 안에 있는 자기들 가족의 먹이를 딴놈이 와서 먹어 치우면 곤란하니까 『두루루루루룩』하고 힘껏 나무를 두드려서 내가 이렇게 힘이 센데 감히 네가 침범하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광릉숲에 사는 딱따구리 중에서 오색딱다구리가 제일 많다. 5~6월 번식기에 산속이 인기척 없이 조용하면 3~4마리의 오색딱다구리가 내가 질소냐고 서로 나무두드리기 경쟁을 벌일 때가 있다. 귀가 아플 정도다.

그런데 크낙새가 내 눈앞에서 1시간이나 나무를 쪼아대도 아무데서도 대항하는 신호가 오지 않았다.

후에도 수차 같은 경험을 통해서 광릉 숲에 크낙새의 수컷이 한 마리 뿐인 것을 알았다. 이 수컷은 경쟁자도 없는데 본능적인 충동에서 나무를 쪼아대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천재일우의 기회

다음날 4월 8일도 전날과 같은 장소에서 잠복하고 기다려보았으나 허사였다.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나 울음소리를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 후에도 크낙새는 3~4일씩 어디든가 잠적해 버려서 나를 불안하게 했다.

광릉 외곽지대에는 큰 숲이 없어서 광릉을 떠나지는 않으리라 믿어지는데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4월 9일은 바람이 몹시 거세었다.

이른 아침부터 크낙새는 나무를 쪼아대서 건재하다는 신호를 보내주었다.

오후 2시까지 역시 그 부근에서 기다리다 자리를 옮겨 보기로 했다. 나는 계곡을 따라 조용히 내려가고 있었다. 제발 크낙새가 눈에 띄어주었으면…. 그때 문득 앞을 보니 70「미터」 전방의 밤나무에 크낙새가 바람을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일단 촬영장소 부근에 당도하면 필요이상의 말도 안하도록 조용히 행동을 한다. 그래도 크낙새의 경계심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는데 이때는 모진 바람소리로 우리가 가랑 잎을 밟는 소리를 크낙새는 못 들은 모양이다.

더 접근해서 선명한 화면을 얻어보려고 살금 살금 기어가는데 단 2~3「미터」도 못 가서 크낙새는 나를 발견하고 날아가버렸다. 4월 10일 토요일, 이날은 내 생애중에 잊혀지지 않는 날이 될 것이다.

이날도 아침 일찍이 우리 일행은 어제의 촬영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나는 수십년된 밤나무 윗 가지에 크낙새가 아주 최근에 파먹은 구멍을 발견했다. 그래서 예정을 변경하고 그 나무를 지키기로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오전 11시 10분 경에 크낙새가 그 나무에 날아왔다.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거리는 약 40「미터」 태양광선의 위치도 최고의 「컨디션」이다. 나는 크낙새가 애벌레를 파기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심한 크낙새는 나무 줄기 뒤쪽으로 돌아가 그곳을 파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붉은 머리만이 간간히 보이고 부리로 쪼아내는 흰 ㅁ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것이 더 나를 안타깝게 했다. 초조한 시간이 50분이나 경과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허사로 끝나는 게 뻔했다.     


생애애 한 번뿐인 장면

문득 묘한 작전이 머리에 떠올랐다.

저 크낙새를 쫓아 버리자, 그리고 파고있는 나무가 보이는 위치로 「카메라」를 이동시키고 기다려보자. 약 50분간이나 한 구멍을 팠는데 크낙새도 미련이 남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 이 위치에서는 가망이 없는 일이니 결단을 내리자.

나는 위장망을 떨치고 기어나와 큰 기침을 했다. 몸은 크낙새와 90도 각도로 하고 옆눈으로 주시했다. 크낙새는 소리도 없이 날아갔다. 정면으로 크낙새를 바라다보지 않은 것은 『나는 크낙새 자네를 보지 못했네』하고 안심시키려는 나의 짠꾀인데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치기만만한 행동에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다.

크낙새가 언덕너머로 사라지자 나는 세 사람이 운반한 촬영도구 일체를 혼자 짊어지고 발이 빠지는 가랑잎에 미끄러지며 목적한 지점으로 뛰어갔다. 큰 바위가 있었다. 그 뒤에 촬영기를 숨기고 가랑잎으로 위장을 했다.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이 비오듯했다.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앞을 보니, 언제 왔는지 크낙새가 벌써 와 기다리고(?)있었다. 거리는 불과 30「미터」다. 너무 가까운 것 같다. 크낙새가 아까의 구멍을 계속해파기 시작했다.

나는 흥분을 억누르며 촬영을 계속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춰봐도 이건 최상의 장면이다.

크낙새는 계속해서 열심히 구멍을 판다.

과연애벌레가 나올 것인가. 벌써 한 시간이나 팠는데 저 나무 속에 애벌레가 있다하더라도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나무줄기 속에 파놓은 구멍을 따라 달아나지 않았을까. 한 시간이면 아무리 느린 애벌레라도 충분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해서 「필름」을 돌렸다.

나의 기우(杞憂)는 적중하지 않았다. 크낙새는 어른의 엄지손가락 크기의 누런 애벌레를 꺼내서 삼켜버렸다. 나는 이렇게 가상(假想)을 내려보았다. 크낙새가 나무를 두드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나무속의 애벌레를 찾기 위한 것이고 그 애벌레를 찾아낸 후에는 다시 그 나무를 쪼아대 놀란 애벌레를 나무속 「터널」의 종점까지 몰아넣고 그곳을 공격해서 잡아 먹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애벌레도 움직이는 동물인데 『나 잡아 잡수시오』하고 같은 위치에 한시간 이상이나 정지해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야조(野鳥)들이 본능에서 하는 행동도 많이 보았고 또 지혜있어 보이는 행동도 많이 보아왔다. 크낙새에 대한 나의 가설을 설명하기는 곤란하나 정확한 판단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인을 부르는 소리

크나새의 촬영을 일단락짓고 번식기가 다가오면 암컷이 어디에서 나타날 것인가 기다려보기로 했다. 광릉의 신록이 눈부신 5월 5일 릉부근에서 크낙새가 새로 파놓은 집 두 개를 찾아냈다. 5월 6일, 나는 크낙새의 암컷을 볼 기대에 부풀며 새로 발견한 집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에 잠복했다. 오전 10시 조금 지나 구면인 크낙새 수컷이 날아와서 구멍을 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촬영기의 「키」를 눌렀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조용히 사방으로 흘러갔다. 전과는 달리 크낙새가 「카메라」 회전음에 반응을 보였다. 파던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도 얼른 「카메라」를 멈추었다.

1분쯤 지났을까. 크낙새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나도 다시 「카메라」를 돌렸다. 크낙새는 다시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카메라」를 정지시키고 숨을 죽였다. 크낙새는 내가 숨어있는 약 4「미터」 전방의 나뭇가지에 와서 앉았다. 어찌나 가까이 날아왔던지 펄럭이는 날개 소리가 녹음이 된 것을 후에 알았다.

그리고는 크낙새는 소리나는 정체를 알아내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위장한 나뭇잎 속에서 숨도 크게 못 쉬고 크낙새를 관찰했다. 가까이서 본 크낙새는 상당히 노조(老鳥)였다. 꼬리도 많이 닳았고 깃도 퇴색해서 초라했다. 발정을 한 탓인지 머리털의 진홍색이 유난히 눈이 부셨다.

『꼬, 꼬, 꼬, 꼬…』 돌연 암컷을 부르는 소리를 냈다. 녹음기가 소리도 없이 돌아가며 그 울음소리를 기록한다.

『클락, 클락』 간격을 두고 일곱 번이나 운다. 이렇게 계속해서 우는 일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암컷을 그리는 마음이 참으로 간절한 모양이다.

다시 『꼬, 꼬, 꼬…』하며 암컷을 찾더니 어디론지 날아가버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큰 소리를 녹음하다니 이건 기적같이 생각되었다. 후일 다시 크낙새의 사진을 찍을 수 있겠으나 이번 같은 녹음은 도저히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TV를 통해 두차례 크낙새를 소개했으나 차질이 생겨서 이 녹음은 아직 공개한 일이 없다.

나는 계속해서 크낙새의 암컷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가엾은 수컷이 판 신혼의 보금자리도 소용이 없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크낙새의 암컷은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8월 11일, 우리는 광릉에서 여름새들의 촬영을 일단락 짓고 짐을 꾸렸다.

벗도 없고 짝도 없는 늙고 외로운 크낙새에게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몇 번이고 광릉 숲을 되돌아보며 차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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