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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Jun 03. 2024

임권택 B-side;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6월 1일 영상자료원의 프로그램 디렉터스 초이스: 임권택 B-side의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토크에 참석했다. 기왕의 대담은 디렉터이신 김홍준 감독(이라는 명칭이 나한테는 익숙하다)님이 진행했는데 스크립트가 없으면 아무 말을 못하는 터라, 내가 진행을 한다고 상정하고 스크립트를 썼다. 토크인만큼 질문으로 끝을 맺었지만 그 과정에 내 비평(이야기)을 많이 넣어갔다. 조금 긴장한 탓에 내 이야기를 너무 짤뚱하게 끝내버린 게 아쉬웠다. 더구나 5월 31일 공개된 한국영화100의 결과에 상당히 실망을 한 탓에--한 분의 말씀처럼, 이 리스트는 오늘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평균적 안목의 타락을 보여주는 것 같다. 동시에 옛날 영화로 갈 수록 정전 위주의 선택이 많은데, 이는 그 정전이 합당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정전 이외의 옛날 영화를 보지 않아서라고 거의 확신한다--부끄러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옛 한국영화를 보고 느낀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소명의식을 담아 자주 남겨보려고 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준비해 간 스크립트를 전문 옮겨본다.





안녕하세요 디렉터스 초이스: 임권택 B-side라는 기획 아래 상영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임권택, 1984)> 시네토크에 참석한 금동현입니다. 디렉터스 초이스라는 기획은 2022년 5월 오즈와 벤더스로 시작했는데요. 시작 당시 기획문에는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이 추천하는 영화를 상영하고 관련 인사를 초청하여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누어 보는” 행사라고 되어 있어요. 김홍준 선생님이야 ‘디렉터스 초이스’의 디렉터[원장]이시기도 하고, 나의 한국영화라는 에세이 영화를 통해 한국영화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적극적으로 자의식화 하기도 했고, 임권택 감독의 개벽으로 영화 일을 시작하셨으니, 디렉터이자 ‘관련 인사’로도 충분히 납득이 되실 것 같아요. 다만 저는 정성일 평론가처럼 임권택 감독의 전문가도 아니고 한국 영화사를 연구하고 있지만 주된 관심사가 김기영과 이만희에 있기 때문에, 저를 아시는 분들에게도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의 관련 인사로 전혀 안 비칠 것 같아요.


이에 제가 ‘관련 인사’가 된 이야기를 감상과 섞어가며 대담을 시작하면 될 것 같아요. 임권택 B-side 기획문에는 “임권택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주목이 필요한 두 작품을 재조명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어요. 그리고 실제로 이 기획에서 상영한 <나비품에서 울었다(1983)>와 방금 보신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를 언급하는 평자를 저는 거의 본 적이 없어요. 기실 저도 이 작품을 2020년 VOD 기획전 ‘나도 프로그래머’에서 홍준호 님이 기획한 이해윤: 위대한 여성영화인, 짱구 엄마를 기억하며를 (https://www.kmdb.or.kr/vod/plan/679) 통해 처음 봤어요.  기획전 소개 글에 홍준호 님이 “이 영화들이 더 좋은 화질과 음질로 공개되길 소망하는 의도”가 있다고 썼듯, 당시 웹에 공개된 영화의 화질은 매우 열악했어요. 화질도 크게 좋지 못하고 파일에 오류가 있는 건지 화면이 되게 작게 나왔거든요. 노트북으로 봤을 때, 제 아이폰 액정 정도 크기로 보였어요.


크기나 화질 같은 화면의 컨디션이 영화 경험을 항시, 언제나, 지배하는 건 아니지만, 알지도 못하는 영화를 이런 컨디션으로 보게 되니... 좀 불손한 자세로 영화를 보게 되더라고요. 화면을 여러 개 두고.. 딴 짓도 종종 해가면서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보다가 어느 순간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습니다




14분 정도인데요. 아마도 기억하시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연화와 지경에게 괴질이 걸리기 전 달 밝은 밤에 각자 서로 다른 공간에서 허공을 보는 장면인데요. 두 사람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장면이 있고 난 다음에 둘 다 괴질에 걸리게 돼요. 영화 속의 세계에서는 접촉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소위, ‘영상적 현실’이라고 하는 화면의 접합에서는 저 둘이 같은 공간에 있거나 뭔가 접촉을 했다고 느껴버리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드라마의 논리로는 성립이 안 되는 지점이 화면의 연속에서 성립되어버릴 때--합리적인 해결이 아니라 실천적인 연속--이 임권택 영화에는 종종 있잖아요? 당장 떠오르는 건 <안개마을>에서 약혼자가 오지 못한다는 속달 편지를 받자마자 비가 내리는 장면인데요. 비가 내림으로써 수옥은 비를 피하기 위해 방앗간에 들어가고 거기서 깨철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는 장면인데, 영화에서는 마치 수옥의 욕망이 비를 내리게 하고 깨철을 부르게 한 것처럼 보이게 돼요.[이 장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내가 3년 전에 쓴 안개마을의 기상학을 참조]


아무튼 이렇게 드라마를 눙치는 화면의 접합에서 임권택은 장인이자 영화작가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또, 지겹지만, 다시, 하게 돼요. 


그 이후에도 기억할 만한 장면들이 쏟아졌어요. 좀 더 자세한 장면들은 토크 중에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다만 영화 말미의 바로 그 장면, 굳이 묘사를 하지 않아도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의 그 장면’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 빙부의 묘를 찾았을 때 오른쪽 저 멀리부터 으스스한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연화와 유모의 장면을 마주쳤을 때... 의 충격은 잊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제가 그 충격을 안 좋은 화질과-작은 화면 크기로-노트북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저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이 영화.... 정말 좋은 환경에서 보고싶다고요. 그리고 2년 후 2022년 5월 29일 태흥영화 기획전에서 <하류인생> GV[하류인생 GV 스크립트]를 하게 됐어요. 20년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를 보고 느꼈던 욕망을 22년 GV 말미에 풀었습니다. 2년 전 제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저는 재작년 ‘나도 프로그래머’ 이벤트를 통해 이해윤 의상감독님이 소개되면서 웹에 공개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를 임권택 감독 영화중에 제일 좋아하거든요. 그 후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를 극장에서, 혹은 최소한 좋은 컨디션의 파일로 보고 싶은 게 제 큰 소망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떤 영화를 어떤 환경에서 보고 싶다거나, 하는 소망이 없는데요. (「만추」(1966)를 보고싶다거나 신상옥의 북한 영화들을 극장에서 보고 싶긴 하지만)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만큼은 극장에서 혹은 블루레이로 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이 GV를 계기로 바람이 이뤄지면 좋겠네요.


짠! 바람이 이뤄진 거죠. 이것이 제가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의 관련 인사로 초청된 배경입니다. 20년에 보고 22년에 추천하고 24년에 상영이 된 거니, 한 평자로 매우 기쁜 순간이고, 매우 복된 마음으로 영화를 봤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무튼 지금까지 어쩌다 제가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관련 인사가 되었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는데요. 이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나눠볼까 합니다. 


1.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에 앞서 임권택 B-side라는 제목과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의 주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대다수의 작품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건 일차적으로 흥행과 상award입니다. 그 다음에는 평문이나 베스트10 같은 일종의 평론-기능을 통한 주목일 것입니다. KMDb에 따르면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는 흥행도 하지 못했고(명보극장에서 개봉해서 2000명이 관람했다) 어떤 수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단독 평문도 신은실 선생님의 평론 밖에 찾을 수 없고, 임권택 감독 본인을 포함하여 평자나 감독들이 임권택의 대표작으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를 베스트 목록에 꼽는 경우도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솔직히 이게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임권택의 전작(全作)을 보지는 못했지만 저한테 는 설명이 필요 없는 걸작이거든요. 심지어 <만다라>보다도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이 더 좋은 영화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이런 의미에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의 관람의 역사 같은 게 궁금하네요는 KMDb에 따르면 명보극장<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서 개봉해서 2,000여명이 관람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신문 기사나 저널에서 이 영화의 제작 소식—우수영화를 목표로 만들어짐—은 찾을 수 있지만, 개봉 소식을 찾을 수는 없더라고요. 월간 『영화』 1984년 12월 호에 광고가 실려있긴 한데.. 두 주인공이 윤지경과 연화가 아니라 장지원과 이화로 소개되는 엉성한 오류가 있는 것처럼.... 뭔가 이 영화는 당대에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한 것 같아요. 


실로 87년 출간된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를 “84년에 만든 단 한편의 영화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는 아직까지도 개봉되지 않은 ‘꿈’의 사극 드라마입니다.”(225)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원장님은 유학 길에 있으셨을 것 같긴 한데, 혹시 개봉하셨을 때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더하여 이 영화는 한국영화연구1에 실린 이용관의 글에 따르면 87년의 시점에 비디오 테이프로 나와있었던 임권택 감독의 작품은 7편 중 하나예요. (증언, 족보, 짝코, 우상의 눈물, 만다라, 나비품에서 울었다,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그렇다면 아무래도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를 비디오로 감상하고 재평가하는 흐름도 있었을 법한데, 왜 이 영화는 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뒤늦게라도 평가되지 않았을까요?  


2. 홈페이지의 프로그램에는 “그 시대를 드러내놓고 찍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영화는 감독 또한 ‘자기 시대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드러”내는 “1980년대 동시대 사회상에 대한 알레고리”를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소개했어요. 정성일 평론가도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에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를 두고 이렇게 말해요. 


역병이 온 도성에 퍼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죽음의 시대와 같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마치 의도한 것처럼 동시대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1984년, 광주 이후 전두환 정권의 그늘 아래에서 연산군 폐위 직후에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는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는 죽음이 온 도성에 짙게 깔려 있고 그런 것들 속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이야기가 벌어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동시대의 알레고리로 보았습니다.(509쪽)


이 질문에 임권택 감독은 조금 멋쩍은 듯 이렇게 답합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될 것이, 내가 이렇게 보고 있으면 어떤 시대든지 그 시대를 꼭 찍고 있지는 않지만 그 시대가 갖는 분위기가 영화에 결국 담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509쪽)


긍정적인 답변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개벽>의 작품화 계기를 두고 학생 운동권 이야기인 도바리의 영화화가 무산되었던 이야기를 전사(前史)로 “보따리” 인생인 최시형을 떠올렸다고 말하는 것에 비하면 큰 차이가 느껴져요. 저도 사실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서 광주 이후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굳이 떠올려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상영 당대와는 무관한 해석이지만, 오늘날 제가 본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는 전염병 그리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만이 함께 할 수 있는 상황 등에서 최근의 팬데믹이었던 코로나 바이러스를 떠올렸어요. 기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저는 되게 위생적인 걸 넘어서 되게 살균적인 상황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대구 사람인데, 대구를 봉쇄해야 한다는 수도권/서울 인간들의 말이 아주 종종 떠오르곤 하네요.




그런 살균적인 게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서는 사랑을 방해하는 주된 요소로 등장합니다.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는 화면 안에 문이나 창 같은 프레임이 또 있고, 그 안에 인물들이 나오는 경우가 잦은데, 이런 것도 개인을 가두는 사회의 위생을 소도구화 한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부분을 임권택 감독님도 충분히 의식화 했다고 느껴지는 게, 가문에서 도망쳐서 걸인들과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마치 서편제를 예비하는 것처럼 음악과 화면이 조화를 이루는 그 장면에서, 춤을 추고 얼굴에 흙을 바르면서 연화와 지경의 표정이 풀립니다. 바로 이 장면: 이 비위생성의 옹호가 있었기 때문에, 연화와 지경이 그 날 같이 자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튼 이건 제 감상을 슬쩍 넣어본 거고요.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면, 원장 님께는 한 번 이렇게 물어보고 싶어요. 비단 정성일 평론가 뿐만 아니라 신은실 평론가도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서 1980년대의 알레고리를 발견해요. 두 명의 대단한 평론가 분들이 이렇게 느끼신 건 분명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감지되기 때문일 거 같은데요. 아무래도 제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건, 94년생인 제가 80년대 이후의 분위기를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 원장님 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 1980년대 광주 이후의 알레고리가 있다고 느껴지시나요? 만일 느껴지신다면 어떤 부분에서 그러하신 걸까요?


3. 임권택 감독 영화에서 갑자기 인물이 변해있을 때 깜짝 놀라곤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연화가 죽은 다음에 지경이 소위, ‘흑화’ 해요. [지경이 연화의 죽음을 알게 되는 숏-상여 쇼트(온통 하얌, 마치 화장같다.)-상여막에서의 장례-그리고 ‘흑화’] 근데 여기서 상여막에서의 장례 장면이 되게 인상적이에요. 



물론 지경의 측면이라서 통상적인 시점 쇼트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바로 이어지는 커트를 통해서 숏-역숏 관계는 성립이 되거든요. 그런데 지경(좌)의 크기가 화면에 점차 커질수록 공교롭게도 지경이 보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숏(우)은 멀어져요. 우리가 지경에게 가까워질수록 지경이 보는 시선에서 멀어지는 이상한 관계가 성립하는 거예요.


임권택 감독은 한국영화연구 1에서 <만다라>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 파트가 좀 임권택 영화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 같아서 조금 길지만 읽어볼게요. 



이제 내게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주제입니다. 무리가 따르더라도 지나치게 끌거나 빨리 끝내버리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전체를 주인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나 스스로 주인공의 의식세계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연기자들과 함께 흥분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적 크레센도로부터 일부러 빠져나오려고 합니다. (....) 그래서 한 개인에게 빨려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입니다.(220쪽)


이 임권택의 야심이 이런 장면에 들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이야기가 아니라 주제이고, 등장인물에 들어가는 법이 없는 것이요. 기실 임권택 감독 본인은 자신의 영화를 휴머니즘이라고 종종 이야기해왔지만 이런 대화에서도 드러나고, 임권택 영화에서 훌륭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은 대부분 통상적인 의미의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멀거든요.  원장님께서는 임권택의 영화를 자주 수식하는 ‘휴머니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4. 이 영화의 ‘그 무덤 씬’ 같은 장면은 거의 곤란할 정도로 대단한 장면이에요. 정말 어떻게 촬영하면 저 멀리에서 달려오는 게, 저 멀리서부터 잘 보이지? 같은 궁금증이 생기게 돼요. 촬영 현장의 기록이 남아 있다면, 조명과 카메라 디렉팅 등을 총체적으로 알고 싶은데요. 아마 쇼트 하나만 놓고 보자면 한국영화사 전체에서 제일 대단한 장면이 아닐까, 라고 저는 생각도 합니다. 이 장면에 대해 원장님은 어떻게 느끼시고 생각하셨나요? 더하여 임권택 감독님이 이 장면을 따로 언급한 적은 없나요?



5.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에서 딱 한 명의 배우만 말해야 하면 무조건 조용원일 거예요. 이론의 여지야 있겠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연화가 죽은 줄 알았는데 돌아온 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냥 그 장면에서 그 다음부터는 유령인 연화와 지경의 장면이라고 봤어요. 그 다음부터는 영화 초반부 신분의 격차 때문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달래는 혼백 간의 결혼이 이뤄진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도 무덤입니다” 같은 대사도 지시하기도 하고, 차후에 지경이 “당신은 아흔 아홉, 나는 백 살” 이라고 말하자 연화가 “나는 열 여섯이에요”라고 답하는 데서 분명하죠. 지경과 연화가 부동으로 누워 있는 자세의 어색함도 혼백 결혼식의 허수아비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럽잖아요. 그렇다면 혼백인 연화가 지경을 죽인 걸로 볼 수 있는데, 이런 맥락 때문인지 에필로그(?)에서 술을 마시고 기침을 하는 지경을 바라보는 연화의 장면은 굉장히 섬뜩해요. 거의 완벽한 무표정인데, 대단한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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