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모토 사부로(川本三郞)의 비평집 아침 햇살처럼 싱그럽게: 영화 랜덤 노트(朝日のようにさわやかに: 映画ランダム・ノート)에 해설로 실린 하타나카 요시키(畑中住樹)의 가와모토 사부로 – 불륜의 영화애를 옮긴다.
최근 젊은--나도 젊지만...- 영화광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느낀 위화감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서 이 글을 옮겼다. 그 위화감이란, 황정리 자서전의 '조용한' 출간에 대해 든 생각들에서 은은하게 전제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영화가 아주 아카데믹하고 스놉한 문화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물론 문학과 음악 가리지 않고 어디든 괴팍한 사람은 많지만, 내가 그 중에서 영화를 가장 좋아한 이유는 사실 간단한데: 그것은 영화에 괴팍한 새끼들이 존나게 많기 때문이다. 괴팍한 새끼들을 거세하는 게 아니라, 괴팍함을 견디는 방식으로 존재하려는 힘이 분명 영화에는 다른 데 보다 큰 것 같고, 나는 그게 좋다. (이런 맥락을 견지하는 최고의 한국 책은 오승욱의 한국 액션 영화다.) 내가 영화를 많이 보고 거기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자랑이 아니다. 그 감각은 아주 중요하다.
(이런 동기가 이하의 글과 완전히 겹치는 것은 아니다. 기실 이하의 글은 [세밀하게 따져보자면] 총력전 시기의 아주 짧은 몇 년을 제외하고는 역사의 全시기에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일본 영화사의 특수성 위에 있다.)
(이 글은 영화 보기의 부끄러움과 탁월함을 모두 전수해준 모 선생님이 알려준 글이다. 본문의 볼드는 내가 했다.)
가와모토 사부로 – 불륜의 영화애
하타나카 요시키(畑中住樹)
신출내기 영화평론가인 나에게, 가와모토 사부로(川本三郞)씨는 몇 안 되는 선배 중 한 명이다. ‘몇 안 된다’라고 하는 이유는, 내가 나의 선배로 인정하는 영화 평론가의 수가 결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선배로 인정하는 기준은 결코 존경의 여부와 관계없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가능하다면 존경 따위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나의 선배로 인정하고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바로, 나에게 질투를 일으키는 사람이다. 나보다 긴 세월을 살았고 내가 보지 않은 영화를 많이 봤어도, 나에게 조금도 질투를 느끼게 하지 못하는 영화평론가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그들을 내 선배로 인정하지 않는다.
내 머리 위에 우뚝 선 영화비평의 거인이자, 내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몇 안 되는 선배들을 거명하자면, 먼저 야마다 코이치(山田宏一)씨, 하스미 시게히코(蓮実重彦)씨, 그리고 가와모토 사부로(川本三郞)씨 세 명이다. 여기서 끝이다, 라고 하면, 거명하지 않은 평론가 제씨가 질투에 미칠지 모르겠다. 뭐, 그냥 중요한 이름을 언급해둔 걸로 하자. 이런 걸로 시간을 끌면 문장을 더 쓸 수가 없으니, 이쯤에서 각설하자.
그런데 방금 말한 세 명의 거인 중에서, 내가 야마다 고이치 씨나 하스미 시게히코 씨에 대해서 느끼는 질투와 가와모토 사부로 씨에 대해서 느끼는 질투는 전혀 다른 종류인 것 같다. 잘라 말하자면 나는 야마다 씨와 하스미 씨가 영화가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체험했다는 데 선망을 품고 있다. 한편, 가와모토 씨에 대해서는, 그가 영화가 가장 빈궁한 시기를 체험했다는 데 선망을 품고 있다.
나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화가 풍요롭지도 않고, 빈궁하지도 않고, 한 번 죽은 영화가 꼴사납게 연명을 꾀하고 있는데 외관만 번지르르한 번영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 잘못되어버린 모조 영화의 시대라고 해야 할까. 그런 엉거주춤하고, 이상한 시대에 영화에 열심인 사람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밝게 빛나는 시대에 인격을 형성하여, 영화의 지혜가 그대로 육체화된 야마다 고이치 씨와 하스미 시게히코 씨의 영화와의 깊은 일체감을—나도 그때 태어났으면 충분히 그 일체감을 획득했으리라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존경은 하지 않지만—나는 맹렬히 질투한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빈사 상태에 있던 시기에, 혼자서 텅 빈 영화관을 다녔던 가와모토 사부로 씨의 처절한 영화체험의 앞에서, 나는 말을 잃는다. 고개를 숙인다. 어떤 불평도 늘어놓지 않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와모토 사부로 씨의 영화 시대는 1960년대를 중심으로 두고 앞뒤로 20년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완전히 침체되어, 이전의 번영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영락없이 망해가던 그 20년 동안,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다. 가와모토 씨는 그 기간 동안, 뭔가 뒤가 구린 사람처럼, 주변을 꺼리면서, 몰래 아무도 없는 영화관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할리우드 황금시대의 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극소수의 부적응자들 만이 도시의 쓰레기들 사이 지저분하고 오줌 냄새나는 극장을 찾고 자질구레하고 작은 영화들만이 아직 남은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물론, 그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가 전부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수지만 훌륭한 영화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훌륭한 영화와만 관계를 맺는 건 영화 팬이라고 할 수 없다. 가와모토 씨는 한 편의 걸작을 만나기 위해서, 열편의 졸작을 보았을 것이다. 아니, 그 뿐 아니라, 만일 한 편의 걸작을 만났다고 해도, 그것을 해맑은 표정으로 추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는, 부끄러운 문화였다. 우리 젊은 영화 팬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그런 시대가 있었다.
가와모토 씨는 그런 시대를, 영화관을 다니기가 거북하던 나날을 경험함으로써, 죽어가는 영화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야마다 고이치 씨나 하스미 시게히코 씨도 같은 시대에 텅 빈 영화관을 다녔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에 앞서 빈틈없이 꽉 찬 영화관에서 테크니컬러의 할리우드 영화의 빛을 받았던 시대를 겪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와모토 씨보다 훨씬 더 강한 영화 사랑을 전수하고 있다.
확실히 가와모토 사부로 씨의 영화 취향은 편향되어 있다. 그는 많은 종류의 영화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MGM의 휘황찬란한 뮤지컬에 대해서는 지금도 반감을 갖고 있다. 어둡고, 범죄자 같은 영화 체험을 가졌기에, 할리우드식의 해피엔딩에 대해서는 언짢을 수밖에 없는 눈을 가진 게다. 가와모토 씨가 〈ET〉를 비판한 것처럼, 그에게는 〈ET〉 따위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가와모토 사부로 씨가 처음부터 삐뚤어진 건 아니었다. 삐뚤어지지 않고서는 영화를 상대할 수 없었던 시대에, 그가 영화와 관계를 맺어버린 탓인 거다. 그리하여 그러한 가와모토 씨 앞에서 나는 숙연해져서,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지금, 지극히 당연한 듯이 B급영화의 훌륭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B급 영화가 정말로(!) 경멸 받고 있던 시대에 가와모토 씨가 B급영화와 몸을 섞으면서, 빈사의 영화를 계속 지켜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영화를 둘러싼 장면은, 지금, 조금 시끄러울 정도로 활황을 보고 있다. 영화는 부끄럽지 않은 문화가 되어, 깨끗하고 밝은 소극장에, 머리가 좋아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점잖게 앉아있다. 과거의 명작들이 한창 리바이벌되고, 비디오는 풍성하게 유통되며, 풍요롭고 아카데믹한 영화의 연구의 시대가 시작되려고 한다.
곤란하다, 며 얼굴을 찌푸릴 자격은, 아무래도 나에게는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이의가 없냐고 하냐면, 나는 하다못해 목소리라도 걸고, 이 살균된 영화 스놉의 전당을 향해서, 가와모토 사부로의 목소리를 드높이 떨쳐보고 싶다. 아니, 드높다기보다는 수상쩍게라고 해야 할까.
영화를 보는 것은 조금도 훌륭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좀스럽고, 초라한 일이다. 그러한 것을 가와모토 씨는 생각하게 해준다. 가와모토 씨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중대한 착오를 안은 채, 영화 보는 것의 부끄러움에 무자각한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말 터이다. 그 착오는, 영화를 사랑하는 게 옳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데는, 사실, 정당한 구실 따위는 없다. 그것은 어느새 우리를 더럽힌 병과 같은 것이고, 고름과 같은 것이다. 말로는 잘할 수 없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마지막 아편에 빠져드는 로버트 드니로의 표정, 이것이 바로 영화 사랑이라는 것의 정체가 아닐까.
연구·학원 도시와 같은 청결한 환경에서 영화가 연구되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잊혀져갈 진실이 그것이다. 영화는 남의 눈을 피해 보러 가는 것이다. 영화에 사랑을 토로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영화와 우리 사이에는 불륜의 관계 밖에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손님이 없는 영화관은 인입선을 통해 차고로 들어간 열차와 같다”라고 하는 가와모토 씨의 감상을 질투할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몸의 어딘가에 아려오는 영화라는 상처의 통증에, 아주 조금의, 자각이 있다.
나는 가와모토 씨로부터, 영화란 부끄러운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배웠고, 동시에 다른 선배로부터는 영화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부끄러움을 당해도 좋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때로는 부끄럽지만 행복감으로 가득한 영화평을 써버리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그런 나의 기쁨으로 어쩔 줄 몰라 쓴 비평(때로는 분기탱천한 비평이 되기도 한다)을 읽고 가와모토 씨가 어이 없어하면서 쓴웃음을 짓고, 아주 조금 밝은 기분이 되어 주었으면 하고, 항상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