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 커 -- 디즈니 영화

by 금동현

번역: 내가 함



지금 할리우드에서 개봉하고 있는 수십 편의 영화 중 오직 한 편만이 아이들의 영화(children film)라고 적절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한 편은 이미 개봉한지 31년이 지난 디즈니의 <신데렐라>(1950)다. 아이들을 위한 영화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확실히 시장은 예전과 같은 모습의 아니다. 오늘날 영화관에는 데이트를 하는 십대들로 가득하다. 영화의 사회적 기반 자체가 변한 것이다. 한때 영화관은 가족들이 함께 보러 가는 곳이었는데, 요즘은 가족들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간다. 요즘 영화관은 부모의 권위와 텔레비전의 폭정을 벗어날 수 있는, 십대들을 위한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한때 가족에게 호소했던 영화들은 이제 부모든 자식이든 그 누구에게도 TV를 떠날 만큼 호소하지 못한다. 아동영화는 TV 네트워크 프로그램에 자리잡고 있다. 가족영화란 지루한 영화를 뜻한다. 우리는 외출을 할 때,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한다—다른 것을 보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거나.

물론 가족 영화와 아동 영화는 전혀 다른 두 장르일 수 있다. 가족 영화는 부모의 감독과 승인을 전제한다면, 아동 영화는 아이들만의 은밀한 즐거움이다—약간의 위험, 어른들이 금지한 것을 몰래 접하는 짜릿함이 포함된 즐거움. 프랑켄슈타인과 하이디 중에서 고르라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프랑켄슈타인을 선택할 것이다. 그 영화에서 더 많은 자극과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이 같은 것’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항상 그럴 거라고 착각한다. 새와 토끼, 요정 같은 것들이 나오는 이유는 아마도 어른들이 이상화한 ‘순수한 어린 시절’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것은 종종 왜곡되거나 미화된 과거의 향수이며, 우리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릴 수 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시절’로 간직하려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그것이 허구임을 안다. 아이의 삶은 에덴동산처럼 자유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다.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프랑켄슈타인은 본질적으로 완벽한 아동 신화다. 그것은 자신의 몸과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이며, 갑작스러운 힘과 분노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 또 제어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엄마의 꽃병을 실수로 깨뜨린 아이는, 무심코 소녀를 짓눌러 죽인 괴물에게 누구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괴물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고, 그런 힘이 있는 줄조차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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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영화들이 지금껏 만들어진 그 어떤 아동 영화들보다 오래 사랑받아온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직 디즈니만이 가족 영화와 아동 영화를 동시에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두 층위의 관객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부모와 아이 모두를 사로잡는 힘—멀리 있는 향수와 바로 눈앞의 불안을 동시에 자극하는 힘이 디즈니 영화에 있다.

디즈니 만화영화는 겉보기에 달콤하고 환하며, 귀엽고 감상적이며, 예쁜 색감과 재미있는 동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순수의 외피 아래에는 어린 시절의 가장 깊고 불안한 신화를 구현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내가 어린 시절 본 <밤비>가 공포영화가 아니었다고 아무리 누가 말해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피노키오> 또한 원초적인 공포의 이야기, 어린아이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디즈니 영화에는 하나의 공통된 서사 구조가 깔려 있다. 때로는 암묵적으로, 때로는 <마녀산에서 탈출(Escape to Witch Mountain)> 시리즈처럼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것은 바로 아이(동물이든 인간이든)가 부모와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부모의 죽음(<밤비>), 유괴(<구조대 The Rescuers>), 가출(<피노키오>), 심지어는 부모의 출장(<남부의 노래 Song of the South>)으로 인해 아이는 혼자 남는다. 이 버려진 아이(때로는 남매 둘이 등장하기도 한다)는 두 가지 유형의 대체 부모를 만나게 된다. 하나는 다정하고 친절하며, 스스로도 아이 같은 존재들로 대개 남성이다(일곱 난쟁이들, <남부의 노래>의 언클 리머스, <칼과 마법 The Sword in the Stone>의 멀린). 다른 하나는 사악하고 분노에 차 있으며 허영심이 강한 여성들이다(<백설공주>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마녀들, <101마리 달마시안>과 <구조대>의 악녀들). 흥미로운 점은 이 판타지가 미국 가정에서 전통적으로 기대되는 역할과 가치들을 완전히 전복한다는 것이다. 판타지 안에서 아버지는 현실에서의 가장이자 훈육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감정의 중심축이 된다. 그는 아이로 되돌아오는데—더 크고 더 힘센 아이일 뿐, 여전히 아이의 감정과 이해력을 가진 존재다. 반면, 일상에서 아이를 돌보고 보호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하는 어머니는 전적으로 악으로 그려진다.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다(디즈니의 여성 악당들은 마른 몸에 축 늘어진 직모를 하고 있으며, 부드럽거나 둥글거나 모성적인 외형은 전혀 없다). 이 판타지는 일종의 탈출 판타지이며 동시에 공포 판타지다.

디즈니 영화는 최고의 경우, 아이로 하여금 자기 삶을 전복시켜보는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 전복은 일상 속의 부모를 제거하는 데서 시작되어, 각 인물들의 역할과 성격을 완전히 새롭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경험은 달콤하면서도 무섭고, 위로인 동시에 공격이 된다. 아이는 일상적인 규칙과 책임에서 벗어난 자유—아이의 관점에서 상상한 ‘어른됨’의 자유—를 맛본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아이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면 이 전복은 위험해지며,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 사악한 어머니는 너무 강력해지고, 아이는 이 판타지를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어른 되기를 포기하고 다시 진짜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피노키오>, <남부의 노래>) 다른 하나는 진짜 어른이 되는 것, 즉 그에 따른 한계, 책임,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것(<밤비>, <레이디와 트램프>). 어느 쪽이든 전통적인 규칙은 결국 다시 회복되며, 질서는 복원된다.

디즈니 영화를 보는 동안 아이는 자신의 금지된 감정들—분노, 좌절, 원망—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어쩌면 그보다 더 숭고한 쾌락일 것이다. 그리하여 디즈니 영화는 결국 ‘일상의 회복’으로 나아간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가며, 그 경험은 감사와 안도 속에서 받아들여진다.

디즈니는 이 공식을 철저히 보호했다. 그 비밀을 뚫고 들어간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다—닥터 수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닥터 T의 5,000개의 손가락(The 5,000 Fingers of Dr. T.)>,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의 기괴한 <화성에서 온 침입자들(Invaders from Mars)>, MGM이 제작한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정도를 겨우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작년 가을에 개봉한 테리 길리엄의 <타임 밴디츠(Time Bandits)>는 놀라울 정도로 디즈니의 공식을 근접하게 구현해냈다. 이 영화는 초현실적인 난쟁이들에 의해 납치된 소년이 우주의 시간 구멍들을 여행하는 이야기다. 소년이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어른들(나폴레옹, 로빈 후드, 그리고 ‘궁극적 존재’까지 포함해)은 멍청하거나, 그보다 더 나쁘다. 단 한 사람만 예외인데, 그것은 숀 코너리가 연기한 아가멤논 왕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다정하고 따뜻하며 강인한 부성적 인물 중 하나로 그려진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악의 화신’과의 전투가 벌어진다. 그는 남성 배우(데이비드 워너)가 연기하지만, 그가 입은 검은 로브는 어느 디즈니 마녀라도 자랑스러워할 만한 의상이다. (그리고 물론, ‘악’이 남성으로 표현됨으로써 디즈니가 만들어낸 불편한 성차별은 사라진다.) 이야기의 끝에서 소년은 현재로 돌아오고, 그의 부모는 탐욕과 어리석음이 빚은 초월적 행위로 인해 자신들과 집을 파멸시킨다. 화재 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관들 사이에서 코너리가 다시 등장한다. 그는 소년을 바라보며 그를 알아보고,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전한다.

<타임 밴디츠>의 문제는 그것이 ‘속내를 너무 드러낸다’는 것이다. 디즈니 영화처럼 달콤하고 환한 외피가 없기 때문에, 어른이라면 누구든지 이 영화가 무엇을 하려는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아동 영화지만, 단 하나 부족한 점은 ‘가족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존심 있는 어른이라면 이처럼 강력한 선동적인 영화를 아이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귀여운 새나 토끼, 요정 같은 것이 없어서, 그 아래에 숨어 있는 진실을 가릴 방법이 없다. 제작자들도 이 점을 인지했던 것 같다. 영화는 곳곳에서 ‘성인용 오락’으로 광고되었고, 부당할 만큼 그 과학소설적 요소나 몬티 파이선과의 연관성이 강조되었다. <타임 밴디츠>는 고전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애초부터 그것은 차단되었고—어떤 의미에서는 검열당한 것이다.

<타임 밴디츠>의 안타까운 사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아동 영화라는 개념 자체에 이미 역설과 자기모순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아동 영화는 어른들이 만들 수밖에 없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어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의상 진정한 아동 영화란 어른들이 가까이하지 못하게 만들어진 영화다. 어른들이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그것이 진짜 아동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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