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응소(소집에 응답함)한다. 태풍이 불거나,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 날. 코로나가 창궐하여 자가격리자가 한 트럭씩 나오던 시절에도 우리는 응소했다. 공무원은 응소함으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 하고자 한다.
태풍이 오는데 공무원이 출근을 해서 뭐 어쩌자는 거냐는타박을 들을 때도 있다. 맞는 말이다. 가끔은 나도 내가 왜 지금 여기 와 있는지 모른다. 그럴 때면 가족오락관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모든 출연자들이 시끄러운 헤드폰을 쓰고 말을 전한다. 앞의 사람이 그다음 사람에게, 또 그다음 사람에게.그러면 제일 처음 말한 단어는 해체되고 망가져 마지막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단어로 도달한다. '까르보나라'가 '라지벌랄라'가 되면 폭소가 터져 나온다.
천재지변의 한가운데 내가 출근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메시지의 맥락은 사라지고 '출근'만이 남는다.
내가 사는 지역은 12월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연고도 없는 면사무소 앞에서 응소했다. 공무원이 되면 군대의 겨울의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꽁꽁 언 눈을 삽으로 부수고, 밀대로 밀고, 그 위에 염화칼슘을 뿌린다. 손발은 쓰릴만큼 시리고 얼굴은 콧물과 눈물로 번들번들해진다.
눈 한 번 치웠다고 유세 떤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흰 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의 노동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뜨끈한 장판에 몸을 누이니 졸음이 쏟아졌다. 한 바탕 자고 나니크리스마스이브는벌써 저물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청승맞게 TV를 보며 마른밥을 먹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공무원으로 산다는 것, 아니 어떤 형태이든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건 나의 노동이 보상은커녕 의미와 가치마저 없을지 모른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다. 때론 억압과 착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는 반복노동일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나는 아직도 시지프스의 형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매일 고통스럽게 돌을 밀어 올리고 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 앞에 절망하길 반복한다. 글을 쓰는 것 역시 나의 몸부림의 일종이다. 그 무엇도 극복하지 못했기에 글을 쓰고 글을 읽고 차고 넘치도록 고통스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