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병이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그냥 우울한 채 살기로 했다고...
매일 밤 침대에 누워서 작가가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우울증을 이겨내고 그걸 바탕으로 자기 계발서를 쓰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극복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쓰고 싶었다. 책 표지에는 팔짱을 끼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내 사진을 넣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나는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2018년 12월, 처음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병세는 좋아졌다 나빠지는 것을 반복했다. 수번의 재발 끝에 조금 요령이 생겼다. 요즘은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지 않아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아프기 전의 삶으로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다. 밥벌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여지없이 마른오징어처럼 널려있다. 거실 바닥에, 소파에, 침대에서 적당히 몸을 뒤집으며 살아간다. 의미 없는 시간들이 흘러가지만 그리 안타깝지는 않다. 나는 불로장생보다 지구 멸망이 더욱 희망적인 사람이다.
몇 달 약 먹고, 몇 달 심리 상담받고, 생활 습관 몇 개 고쳤다고 인간 비타민, 행복 바이러스가 될 수는 없었다. 그저 예전보다 죽을 생각을 조금 덜 하고 가끔은 에너지를 쥐어짜 사람들을 만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 먹을 뿐이다. 여전히 예민하고 수시로 질질 짜고 대부분 비관적이며 대체로 기운 없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날은 세계의 끝과 같아서 우리들은 거기부터 시작하자고'
일본의 밴드 세카이노 오와리가 부른 <earth child> 노래 가사의 일부이다. 이 밴드의 보컬인 후카세는 어릴 때 ADHD를 앓았다. 그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심한 학교 폭력을 당한 후카세는 자퇴를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낯선 환경은 그의 마음병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1년 만에 유학을 마친 그는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갇혔다. 그곳에서 치료를 받던 후카세는 정신과의사가 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그때부터 공부에 매진하지만 몸이 상할 정도로 강한 치료를 오랫동안 받은 탓에 후카세의 기억력은 온전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또 실패하고 의사가 되기를 포기한다.
ADHD, 중졸, 망가진 몸과 정신, 그리고 꿈조차 마음껏 꿀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후카세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모아 밴드를 만든다. 여기가 세상에 끝이라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불분명한 희망을 품고서. 세카이노오와리(세계의 끝)가 탄생했다.
전혀 행복하지 않다. 인생에 별다른 흥미도 없다. 더 좋아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진심으로 걱정할 힘이 없다. 누군가의 경사를 진심으로 축하할 기운이 없다. 살아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껍데기로 살아간다. 악마가 나타나 내일 당장 죽는다고 말해도 그저 ‘알겠다'라고 대답할 것만 같다. 내일 출근 안 해도 되니 이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삶의 밑바닥에 젖은 낙엽처럼 눌어붙어있다. 아귀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뿐이다. 아무도 그런 바닥에서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아 조금 외로울 뿐이다. 이 지구에 나처럼 쓸쓸한 인간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도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