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 선생님에게 물었다. 내가 왜 아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내가 병에 걸린 이유가 뭔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지. 담당 선생님은 우울증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원인에 집중하는 것은 치료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알고 싶었다. 빨리 낫고 싶었다. 열심히 일하고 잘 웃고, 사람들과 어울렸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내가 a.k.a. 정신병자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우울한 건 다른 사람보다 너무 예민해서다. 과거의 일을 그냥 흘려보내지 못해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지를 못해서다. 타고난 성정이 유약해서다. 융통성이 없어서다. 점쟁이는 내 사주에 물이 너무 많아서라고 했고, 타로카드는 올해 운이 좋지 않아서라고 했다. 새로 옮긴 직장은 매일 업무량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잠을 잘 못 잤고 커피를 달고 살았고, 배달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다.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가다 보니 나였다. 문제는 나였다. 늘 내가 문제다.
이렇게 땅굴을 파고 들어갈 줄 알았기에 의사 선생님은 원인 찾기를 그만두라고 충고했는가 보다. 나는 우울하면 우울할수록 왜 우울한지에 집중했고, 답을 찾으려고 애쓸수록 내가 싫어졌다. 가장 혐오스러운 생물체의 가죽을 덮고 사는 일. 그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지난 며칠 동안 다시 병이 도졌다. 나는 주말 내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오늘은 출근도 하지 않았다. 니체라든가 고흐라든가 정신 발작 상태에서도 위대한 작품을 남기던데 나는 무기력이 심해져 손가락은커녕 눈도 깜빡인 힘이 없었다.
까무룩 잠이 들어 꿈인지 생시인지도 구별이 안 갈 정도로 잤다. 전기장판을 너무 세게 틀어놓고 자서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땀으로 범벅된 몸을 깨끗이 씻고 나니 정신이 돌아온다. 나는 멀리 사는 엄마에게 나의 안부를 전하고, 밥을 먹고, 쓰레기를 버리고, 아파트 주변을 산책했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좋아하는 과자를 한 봉지 샀다. TV를 보면서 과자를 먹으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그렇게 나는 또 죽을 고비를 이겨냈다.
어차피 우울한 채 살기로 했다. 뚜렷한 호전이나 완치에 목적이 없으니 원인을 파고 들 이유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홀가분해진다. 나는 병을 물리치는 대신 병과 함께 살기로 했다. 병마를 내쫓기 위해 쓰던 힘으로 무던한 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딱 그 정도의 에너지밖에 가진 것이 없고 딱 그 정도의 그릇의 사람이다.
감기에 걸린 사람은 따뜻한 물을 마시고 온몸을 이불로 돌돌 감싸고 쉰다. 왜 감기에 걸렸는지, 왜 하필 그게 나인지, 감기의 원인과 증상, 기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울증이 정말 마음의 감기라면 일단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고 침대에 드러눕는 것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픈 건 엄마 젖을 못 먹고 자라서가 아니다.무슨 대단한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니다. 전생의 카르마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감기는 그냥 감기이고, 우울은 그냥 우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청춘이라 아프고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