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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by 금은달

내가 영국에서 태어났다면 진즉 우울증으로 죽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진즉 총으로 사람을(그러니까 나 자신을 포함하여) 죽였을 것이고,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굶어 죽었을 것이며, 중국이든 어디든 그 어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나는 적응을 못한 미운 오리 새끼였을 것이다.



그나마 한국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생존했다. 모든 것이 지리 덕분은 아니었겠으나 지리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껏 생존했겠는가.



나는 3살부터 20살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2006년까지는 꼼짝없는 서울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서울은 어쩐 일인지 90년대에 머물러 있다. 낡은 아파트와 눅눅한 지하셋방, 정돈되지 않은 골목길과 이질적인 플라타너스, 껌이 잔뜩 눌어붙은 보도블록들, 아지랑이가 뭉개 뭉개 피어오르트 콘크리트, 보는 것만으로 시끄러워 보이는 네온사인, 어깨를 부딪히며 걷는 행인들과 여기저기 늘어선 노란 캡의 택시, 조금은 서늘해 보이는 한강과 그 위를 내달리는 지하철, 그 뒤로 떨어지는 저녁노을. 이것이 나의 유년시절 지리적 혜택이자 저주인 서울이다.



나는 서울에서 번잡함과 조급함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서울의 화려함과 현란함은 결코 내 안에 스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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