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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우 Jan 04. 2021

그 사람의 등 너머에는

2008년, 인도, 델리에서 만난 사이클 릭샤왈라의 등

인도에서 열흘 정도 머물다 보면 자연스럽게 협상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인도에 도착한 첫날부터 고난은 시작되었다. 마치 모이주는 할머니를 발견한 광장의 비둘기 떼처럼 몰려드는 사기꾼과 상한가가 없는 바가지의 향연은 초보 배낭여행자에게 크나큰 시련이었다.


2008년 당시 인도는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다. 버스는 너무 타기 어렵고 지하철은 노선이 너무 짧았다. 어쩔 수 없이 릭샤라고 불리는 택시 비슷한 차량을 타야 했다. 릭샤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삼륜차 형태로 생긴 오토 릭샤였고, 다른 하나는 앞에 자전거가 달려 사람의 힘으로 움직여야 하는 사이클 릭샤였다. 둘 중 무엇을 타던 외국인에게는 규정 요금 이상의 바가지를 씌웠다. 


하루는 델리의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에서, 그래도 매연이 덜 해 숨쉬기 편하다는 티벳탄 콜로니로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빠하르간지 끄트머리에 있는 큰길에서 오토 릭샤를 타기 위해 흥정을 했다. 릭샤 호객꾼에게 목적지를 말하자 생각보다 훨씬 큰 금액을 불렀다.


“쓰리 헌드레드 식스티!”


인도 여행 3일 차의 나는 호기롭게 절반을 깎았다.


“노노, 원 헌드레드 에이티!"


어라, 예상외로 순순히 오케이를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안도감과 약간의 승리감을 느끼며 릭샤에 탔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돈을 건넬 때, 릭샤 구석에 붙어있는 허름한 미터기를 발견했다. 있는 줄도 몰랐고, 있다 해도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미터기에는 뚜렷하게 금액이 나타나 있었다.


‘80루피’


릭샤꾼은 순수한 배낭여행자의 순정을 짓밟았다.




인도 여행 열흘 차. 이제 협상의 기술을 터득했다.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적정 가격을 물어보는 것이다. 적정 가격을 알아냈다면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간다. 협상 장소는 릭샤꾼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 유리하다. 그들 앞에서 가려고 하는 목적지를 말하면 여러 명의 릭샤꾼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시세의 3, 4배가 되는 금액을 말한다. 내가 적정 시세를 알고 있더라도 베테랑 릭샤꾼들은 외국인에게는 순순히 그 가격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럴 때는 마지막 방법을 쓴다. 원하는 가격의 120% 정도 금액까지 협상한 후 굿바이라고 말하고 쿨하게 뒤돌아 가 버린다. 이때가 가장 중요하다. ‘나는 너희가 없어도 된다. 탈 것을 못 구하면 걸어서라도 가겠다!’라는 의지가 뒷모습에서 풍겨야 한다. 발걸음은 거침이 없어야 하지만 너무 빠르면 안 된다. 그런 의지를 풍기며 5m 정도를 걸어가다 보면 손님이 아쉬운 릭샤꾼 한 명은 나를 따라오기 마련이다.


“오케이, 오케이, 레츠 고.”


그동안 호되게 사기를 당해왔지만, 이 방법을 터득한 뒤로는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적정 금액 수준으로 협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내가 머물고 있던 티베탄 콜로니에서 유명한 유적지인 붉은 성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걸어가기는 먼 거리이고 마땅한 대중교통도 없었기 때문에 사이클 릭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매연이 풀풀 나는, 델리 공해의 주범인 오토 릭샤에 질렸기도 했거니와 새로운 탈 거리를 경험해 보자는 의도였다. 항상 그래 왔듯 릭샤꾼은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불렀다. 하지만 난 이미 열흘 동안 인도를 방황한 나름 베테랑이었다. 더는 너희들의 바가지에 속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해 협상에 임했다. 협상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나는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겠다는 심정으로 가격을 쥐어짰다.


“투엔티 루피!”

“노노노. 써티 루피.”

“노! 잇츠 투 익스펜시브! 투엔티!”


그동안 사기당했던 비용을 쥐어짜서 돌려받겠다는 의지가 무의식적으로 담겨있었는지 나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사이클 릭샤꾼은 패배를 인정했고 붉은 성까지 20루피에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애초 계획보다 10루피를 더 저렴하게 흥정한 나는 뿌듯한 승자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사이클 릭샤에 올랐다.


사이클 릭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느낀 것은 바람의 흐름이었다. 자전거의 속도에 맞게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바람이 내 몸을 간지럽혔다. 잠시 바람을 느끼고 나자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혼잡한 델리의 도로를 자전거로 주행하는 것도 하나의 묘미였다. 도로 너머의 이국적인 풍경과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교통수단들이 길거리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먼지와 매연이 가득 찬 델리의 공기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바람을 느끼며 경치에 몰입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바로 등이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사이클 릭샤꾼의 등......


분명 출발할 때는 말라 있었다. 하지만 릭샤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벗은 등 위에 맺힌 땀방울은 하나, 둘씩 늘어났다. 호흡도 땀방울이 늘어감에 따라 가빠지는 것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조금 거친 숨소리 정도였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헐떡거림으로 바뀌었다. 등에 맺힌 땀방울은 아니, 더는 땀방울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흐르는 땀 줄기는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이제는 흐르는 바람도, 델리의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릭샤꾼의 등과 거친 숨소리만 느껴졌다.


자전거로는 오르기 힘든 오르막길에 이르자 릭샤꾼은 자전거에서 내려서 온몸으로 릭샤를 끌기 시작했다. 나는 왜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을까. 아니 아침밥만 먹지 않았었더라도 조금은 미안함이 덜했을 텐데…...  내가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 자신의 편안함보다 타인의 불편함이 나의 감정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10루피를 깎아 조금 더 싸게 목적지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성취감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붉은 성까지의 길은 참 멀었다. 아니 솔직히 멀었는지 가까웠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부터는 계속 릭샤꾼의 등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 사람이 불렀던 30루피. 내가 불렀던 20루피. 10루피면 우리나라 돈으로 150원 정도다. 나는 무엇을 얻었나? 나를 돈으로 보던 사기꾼들처럼 어느 순간부터 나도 다른 사람들을 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붉은 성에 도착한 후 나는 그 릭샤꾼에게 30루피를 주었다. 릭샤꾼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없이 다시 자신의 길을 떠났다. 조금 불편했던 마음을 돈으로 지불했다. 대신 거친 숨소리로 땀을 흘리던 릭샤꾼의 등에서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내가 지불한 돈 너머에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동안 돈을 건네는 것으로 나는 충분한 가치를 지불했고 내가 할 일을 다 끝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낸 돈 뒤에는 나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걸 몰랐다. 내가 낸 돈은 릭샤꾼의 땀의 대가였고 거친 호흡의 대가였다. 협상할 때는 몰랐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경험한 그 땀과 숨소리에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식당에 들어가 무심코 주문하는 밥 한 그릇에도 많은 사람이 연관되어 있다. 그 안에는 요리하는 사람이, 서빙하는 사람이, 계산하는 사람이 들어가 있다. 가족이, 또는 친구가 직접 만들어주는 밥이 맛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과 정성을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는 돈을 냈으니까, 나는 윗사람이니까, 나의 의도는 정당하니까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갑질로 이어진다. 돌쇠가 썰어 준 고기 한 근과 김 서방이 썰어 준 고기 한 근의 크기가 다른 것처럼 나의 행동 뒤에는 항상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내 주변의 사소한 물건 하나라도 사람이 묻어있지 않은 것은 없다. 나는 그날 릭샤꾼의 등에서 조금 더 감사하는 방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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