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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우 Jan 13. 2021

가장 높은 곳에서 얻은 것

2015년 네팔,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 언저리에서

히말라야는 산보다 사람이 좋았다.


그곳은 우연히 만난 사람도 친구가 되고 스쳐 가는 사람도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장소였다. 흰 눈을 어깨에 잔뜩 짊어진 거인 같은 설산의 풍경은 내 가슴을 뒤덮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행들과 힘께 난롯가에서 장작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카드 게임을 하던 시간과, 산을 오르내릴 때 마주친 전 세계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스스럼없이 안부를 나누는 순간이었다.




나는 괜찮을 줄 알았다. 


내향적이며 이성적인 INTJ형이기 때문에 혼자 지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고민 없이 2주를 잡고 떠난 혼자 떠난 네팔 여행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직 볼거리가 남아있는 시간에는 괜찮았다. 낮에는 가이드북에 있는 관광지를 구경하고 밤에는 혼자 방에서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시면 충분했다. 그렇게 날마다 같은 패턴을 보냈다.


하지만 먼지 많은 카트만두를 떠나 요양하기 좋다는 포카라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던 날, 더 이상 할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해가 지는 여섯 시 즈음부터,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는 아홉 시까지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날들이 매일매일 반복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 어스름이 지기 시작할 때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막막함과 외로움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히말라야 트래킹을 하기로 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네팔 여행 방법 중 남은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등산을 해 본 적이 없는 초심자의 도전은 과감했다. 등산화도 등산복도 없었지만 산지 얼마 되지 않은 튼튼한 운동화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츄리닝을 믿으며 입산 허가증을 받았다.


트레킹을 시작하는 마을 나야풀까지는 택시를 탔다. 운이 좋아 같은 방향으로 가는 한국인 여행객들을 만나 일행이 되었다. 택시비를 절약할 수 있던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오랜만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바닥난 나의 공허함을 채워 주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외로울 것 같았던 산행은 시작부터 나쁘지 않았다. 


나야풀은 비에 젖은 풀내음이 나는 동네였다. 트래킹을 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온 많은 사람들과, 가이드나 포터 일을 하러 온 현지 사람들이 뒤섞여 마치 인종의 박물관 같았다. 보이는 풍경은 우리나라 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길 위에는 새벽부터 내린 비로 군데군데 물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한 시간 정도 걷고 나자 드디어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나마스떼.’


산을 오르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이 마주칠 때는 네팔어로 인사를 나눴다. 보통 내려가는 사람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올라가는 사람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이에 답했다. 히말라야에서는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언어도 필요 없었다. 경쟁 없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올라가는 곳. 손짓, 발짓과 입가에 걸리는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고프로를 들고 다니며 5초에 한 번씩 사진을 찍는 독일인 여성도, 자신은 스페인 사람이 아니고 까탈루니아 사람이라고 외치던 수염 많은 남성도, 트레킹 가이드 일을 하면서 딸을 대학까지 보냈다고 자랑하는 네팔인 삼촌도 히말라야를 오를 땐 모두 친구였다. 


키가 180cm는 넘어 보이는 미국인 커플은 자신들 키의 절반이 넘는 배낭을 메고 거침없이 산을 올랐으며, 우리와 비슷한 코스로 산을 오르는 중국인 청년들은 항상 테이블이 넘칠 정도로 가득 음식을 차려 먹었다. 그리고 히말라야에 그렇게 많은 한국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마스떼’ 만큼이나 많이 한 인사말은 ‘안녕하세요'였다.


해발 3210m의 푼힐 전망대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일행에게 빌린 태극기를 펼쳤을 땐, 갑자기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어딘가에는 남아 있게 될 내 사진을 떠올리며 눈보라 속에서도 열심히 미소를 지었다. 




히말라야는 풍경도 좋지만 사람 그 자체가 즐거운 곳이다.

 

아마 지금도 세상 어딘가, 나도 모르는 나라에 누군가에게 내 사진이 한 장쯤은 남아 있겠지? 히말라야가 나에게 즐거운 추억이듯이 당신들에게도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기나긴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겠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즐거움을 잊지 말아야겠다. 


아니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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