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기 위한 퇴사 이야기
이틀간 야근을 하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을 다 뒤집어엎으라는 지시를 상사에게 받았던 오전, 내 눈에선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마스크까지 한껏 적셔버렸고, 화장실에 가서 통곡하듯 한참을 운 뒤에야 이내 진정이 되었다. 이 소식을 외주 디자이너에게 전하면서도 나는 또다시 울었다. 그날의 나는 감정적이고 프로답지 못했다.
현타가 왔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생리를 며칠 앞두고 있었고 지난 연애에서도 꼭 생리 전에 애인과 다투었던 기억이 스쳤다. 생리 전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 작은 말에도 상처받고 그냥 웃어넘기지 못했던 시간들. 지난달에는 동생과 다투었고 지지난달에는 아빠의 이야기를 하다가 울었다면 나는 pmdd가 맞을까?
‘월경 전 불쾌 장애’라 지칭하는 pmdd는 생리 전 감정 기복을 다른 사람보다 심하게 느끼거나 극도의 우울감을 느끼는 정신과 질환이다. 평소 생리 전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pms가 다른 이들보다 심한 편이긴 하지만,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멈추지 않은 적은 없었다. 이것저것 검색을 해 보다가 이대로 있으면 다음 생리 전에도 문제가 발생할 것 같아 미리 pmdd 약을 처방받고자 주말이 되어 가까운 정신과에 방문했다.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께서는 pmdd 약을 처방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으신 채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셨다.
이전에 정신과에 방문해본 적이 있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냐, 누구랑 사느냐, 가족끼리 사이는 어떠냐 등 기본적인 걸 한참 물어보시곤 pmdd약 처방을 해 주시는 대신 우울, 불안 요소 검사를 하자고 하셨다.
우울, 불안 요소 검사지는 각 2세트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30개가 넘는 항목 중 내 기억에 나는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자주 하는가
일상생활에서 어지러움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나의 미래가 밝고,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밤에 잠을 잘 자는가
무슨 일이 당장 일어날 것 같은 걱정을 하는가
이와 같은 검사항목을 5단계로 나누어 나의 증상을 체크한 다음, 검사 결과를 기다렸는데 의사 선생님의 진단은 뜻밖이었다.
단순한 pmdd라고 보기엔 우울, 불안 요소가 높네요. pmdd가 아니라 기존에 있는 우울증, 불안장애가 생리 전에 더 심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볍게 pmdd 약을 처방받으러 갔다가 우울증 진단을 받고 다른 처방 약을 받아서 귀가하던 길,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눈물이 좀 많긴 하지만 나 이렇게 멀쩡한데 정말 내가 우울증이 맞을까? 내 마음 상태에 대해서 의사 선생님께서 진단을 내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겉으로는 졸리다는 핑계로, 솔직히 말하면 약에 의존하기 싫다는 이유로 점심약을 건너뛰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우울증, 불안장애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5년간 다니던 직장에서도 사람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을 얻었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환경을 바꾸어 주는 것이 좋다는 권유에 퇴사를 하였고, 이듬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나는 거짓말처럼 다시 좋아졌다. 그런데 내가 또 우울증이라고? 이제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과는 달리 고작 한 달 사이에 내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스트레스로 인한 어지럼증이 오기 시작하면 잠들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활자를 봐야 하는 직업인데 어지러워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인쇄를 넘길 때마다 불안함이 극도로 치솟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갈등을 겪었던 상사와 맞닥뜨릴 때면 또 같은 일을 겪을까 봐 괜히 가슴이 뛰었다.
그제서야 어디선가 읽었던 말이 생각이 났다. 현대인들이 자신에게 마음의 병이 있는 줄 모르고 산다고.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마음 상태는 내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의사 선생님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다시 한번 나를 지키기 위해 결국 지난주 회사에 퇴사 통보를 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