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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kwell Jan 15. 2023

그래도 아직 영화는 아름답다

2022년 11월 영화일기

11/02 <인생은 아름다워>_메가박스 월드컵경기장

예매할 땐 별생각이 없었다가 눈앞에 놓인 해사한 대형 포스터와 제목을 보고서 뒤늦게 투덜거렸다. 며칠 전 발생한 참사에 대한 참담한 뉴스 보도들에 더 이상 눈을 두기 싫어 급하게 영화관을 찾은 참이었다. 극장에 도착하니 더 냉소적이게 돼서 예매 취소 가능 시간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인생이란 정말이지 아름답지가 않다. 게다가 저명한 동명의 이탈리아 작품도 있다. 차라리 극 중 넘버이기도 했던 <알 수 없는 인생>이나 <뜨거운 안녕>이 (이 역시 게으른 작명으로 꼬집히겠지만) 타이틀로서 더 잘 어울려 보인다. 결국 영화는 다 봤다는 얘기다. 심지어 울기까지 했다. 염정아 때문에... 돌이켜보면 염정아라는 배우에게 실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영화에서든 제 몫은 단단하게 챙기는 배우를 지켜보는 건 꽤 고마운 일이다. 관람 도중 노래를 부르는 염정아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심지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란 노래를 불렀다는 것까지 생각이 났는데, 어떤 영화 속 OST였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다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번뜩 떠올랐다. <소년, 천국에 가다>. 개봉 연도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때로부터 17년이나 멀어졌음에도 여전히 아름답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


11/03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_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너무 긴 제목을 가졌지만 '복사+붙여넣기'를 해서라도 절대 틀리지 않고 발음하고 싶게 만든다. 단번에 정확히 따라 읊거나 쓰기가 어려워 보이는 제목마저 이 영화의 성격을 대변한다.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이토록 비범하게 만들 수 있다니. 솔직히 이런 설명도 턱 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무능한 관객인 나는 아마도 이 영화를 실시간으로 보면서도 제대로 된 설명글 한 줄 적지 못할 것이다. 무조건 경험해 봐야만 느낄 수 있는 영화가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궁금해하는 이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이 그저 친절하게 보여주기만 하면 되니까! 현재 영화 밖 세상이 불친절한 것들로 가득한 상태다 보니 "타인에게 늘 친절하라"라는 플라톤의 명언이 떠오르기까지 했던 후반부의 액션 시퀀스를 보면서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앞으로 나는 몇 번이나 그 다정한 액션씬을 되감아 볼까. 현재로선 짐작조차 어렵다.


11/04 <탑>_라이카시네마

홍상수의 영화는 <그 후> 이후 처음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권해효 주연의 흑백영화로 다시금 홍상수 월드에 빠져들었다. 오직 홍상수만 구현할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경제적인 멀티버스를 체험한 것 같기도 하다. 작은 건물 안에서 돌고 돌며 여러 인간으로 살아야 하느라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 건물주를 연기한 이혜영의 존재감은 무서울 정도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베드씬. 여기서 베드씬은 병수(권해효)가 혼자 침대에 누워 독백 아닌 독백을 하는 장면을 말하는데, "혼자가 편해. 혼자 살아야 해..."라고 나지막이, 그러나 선명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뭐랄까 그냥 아름다웠다. 건강하게 살고 싶지만 담배와 고기가 너무 맛있는 삶. 사람을 가려서 만나지만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 홍상수만큼 인간의 다면성을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묘사할 줄 아는 감독이 또 있을까. 담배를 태우다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듯한 병수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를 한숨을 뱉고 말았다. 홍상수의 영화를 예전만큼 즐길 순 없게 되었지만, 흑백과 권해효와 홍상수의 조합이라면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11/08 <자백>_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인 2역을 소화한 거나 다름없는 김윤진은 터뜨릴 땐 터뜨리고 추스를 땐 추스르는 감정 연기로 이 영화의 무게감을 가져간다. 반면에 소지섭은 <신세계>에서 가장 매력이 없는 캐릭터 이자성(이정재)이 연상될 정도로 내내 당하고 당황하는 리액션만 보여주는 것 같아 아쉬웠다. 김윤진과 소지섭이 탁상공론을 하면 할수록 달라지는 상황에서 바쁘게 연기한 나나와 최광일을 지켜보는 건 <자백>의 가장 큰 재미이자 장점이었다. 특히 주연배우들 중 가장 경력이 적다고 할 수 있는 나나는 (중반까지만 흥미로웠던) 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에서보다 알맞은 옷을 입은 것 같았다. 반전의 반전들이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지도 했고 몇몇 설정의 구멍들이 눈에 띄었지만, 이 정도면 준수한 스릴러였다고 생각한다. 시간 관계상 사운드가 좋은 비싼 상영관에서 보게 되었는데 본전이 생각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


11/10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_메가박스 신촌

애도 영화로선 더할 나위 없었다. 채드윅 보즈먼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마블 유니버스의 선택은 존중하고 싶다. 다만 네이머(테노치 우에르타)와 그의 세계관을 등장시키고 묘사하는 데 힘을 들인 나머지 정작 새로운 블랙 팬서로 나선 슈리(레티티아 라이트)에 대한 대우가 부족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슈리는 복수심으로 블랙 팬서를 계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블랙 팬서가 된 슈리의 향후 고민은 마블이 꼭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로까지 보였다. 또 다른 뉴페이스 아이언하트(도미니크 손)의 등장 방식은 기대 이하. 클라이맥스 액션 시퀀스까지 아쉬웠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동력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 편이 되어 함께 싸우기도 모자란 이들끼리 왜 싸우게 만들지? 이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배우를 갑작스레 떠난 보낸 제작진들에게 여유가 없었던 걸까. 쓰다 보니 단점들만 골라 쓴 것 같은데, 애써 옹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번에도 "와칸다 포에버"를 자신 있게 외치고 싶었을 뿐.


11/22 <파이어 버드>_라이카시네마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누군가는 이런 사랑을 하고 있겠지,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면 앞이 캄캄해져 극장 속 암전의 순간이 반가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던 과거의 내가 무안할 정도다. 냉전시대 소련에서도 누군가는 예술을 동경하고 금기시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은데, 영화는 어떠한 개성도 없이 지나칠 만큼 안정적이어서 어딘가 모르게 답답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일반 관객인 내가 봐도 컷과 컷이 매끄럽지 못한 지점들이 눈에 띄었고 그것은 곧 배우들의 연기가(심지어 중요해 보이는 장면에서!) 튀어 보이게 만드는 불상사로 이어졌다. 배우들의 말끔한 비주얼과 성실한 연기가 보다 섬세한 연출력과 만났다면 빛났을 텐데, 아깝다. 영화는 엔딩크레딧 때 이러한 문구를 덧붙인다. "이 실화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공유해 달라" ...그래, 이 실화 자체는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고 공유하고 싶다. 영화까지 권유할 수는 없어 미안하다. <브로크백 마운틴>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이 근래 몇 년간 기념비적으로 등장한 <캐롤>, <문라이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으로 눈이 한껏 높아져서일지도 모르겠다.


11/23 <폴: 600미터>_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상영관 속 안락한 의자에 몸을 기댔을 뿐인데 가히 지옥을 맛봤다. 누군가 말했다지,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라고.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소공포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라니. 공포영화라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걸까. 사고나 사건이 아닌 상황극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에서 <127시간>이나 <베리드>가 보여준 고립 재난과는 다른 성격의 작품이었다. 영화 <히말라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조연상을 수상했던 라미란 배우의 소감까지 뜬금없이 떠올랐다. "거기 왜 올라가느냐고 많이들 묻는데, 올라가 보면 압니다." 그래, 올라갈 일 없는 나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 여러모로 괴로운 체험이었지만 물(갈증), 가방, 조명탄, 컨버스화, 속옷, 핸드폰, 드론 심지어 독수리까지 알차게 활용하여 서스펜스를 자아낸 이 영화의 재치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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