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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kwell Jan 15. 2023

동화처럼

2022년 12월 영화일기

12/04 <올빼미>_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시리즈물로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들이 있다. 두 시간 안에 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라거나, 두 시간만 즐기기엔 아쉬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때. 이 두 가지 감상은 언뜻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올빼미>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된다. 일회성으로 끝내기엔 아까운 아이디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OTT 시리즈로 제작됐다면 본전은 뽑고도 남았을 것 같다. 역사적인 사실에 과감한 픽션을 덧대는 사극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럴듯함일 텐데, 본 대로 들은 대로 말하지도 못하게 하는 현 대통령과 정부를 생각하면 누구보다 그럴듯한 모습으로 시의적절하게 등장한 작품이다. 투 탑으로 출동한 류준열과 유해진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냈다. 잘할 줄 알았지만 더 잘한다. 특히 유해진. 사극 속 멜랑꼴리한 왕을 한두 번 보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처음 본 듯한 고통 및 히스테리를 유해진은 온몸으로 표현했다. 두 주연 배우를 제외한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전체적인 앙상블이 좋았다기보다는 배우 개개인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끔 연출의 판이 잘 짜인 것 같다. 이 작품의 시리즈를 상상했던 첫 번째 이유가 캐릭터들의 전사 내지 개인사들을 좀 더 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12/05 <본즈 앤 올>_ 메가박스 상암월드컴경기장

손가락 사이로 본 장면 반, 맨눈으로 본 장면이 반인 것 같다. 식인 장면의 수위가 예상 밖이었다. 영화 말미, 리(티모시 샬라메)의 힘겨운 한 마디가 여운을 남겼으나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볼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배우들에 대해선 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매런(테일러 러셀)을 보는데 박찬욱 영화의 태주(김옥빈)와 숙희(김태리)가 떠올랐다. 어느 별에서 똑, 하고 떨어진 듯한 배우처럼 보였다는 점에선 김태리와 무척 닮아 보이기도 했다. 다들 티모시 샬라메를 보러 갔다가 나올 땐 테일러 러셀만 검색하지 않을까?(내가 그랬다...) 티모시는 이번에도 티모시를 했다. ~가 ~를 했다는 식의 표현, 가능한 안 쓰려고 하는데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현재 티모시를 가장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이 루카 구아다니노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티모시가 가지고 있는 어떤 관능을 감독이 남용하고 있지는 않나 의구심이 들었다. 리가 동성 인간을 꼬셔서 식인을 하는 장면이 꼭 필요했을까. 티모시가 아닌 다른 배우가 리를 연기했어도 묘사될 장면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설리를 연기한 마크 라이언스는 <돈 룩 업>에 이어 거부감이 드는 인간상을 이번에도 징그럽게 소화했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매런을 괴롭힐 때는 그의 침방울마저 함께 연기하는 것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에 사무친 인간이 괴물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는 매런이 설리를 보면서 자신의 노년을 상상했을까 봐 걱정했다. 자신의 이름을 제삼자가 부르듯 말하며 자기소개하는 사람은 경계해서 나쁠 게 없다.


12/16 <김혜리의 필름클럽> 6주년 공개방송_SBS 락 스튜디오

필름클럽 공개방송에 당첨이 돼서 다녀왔다. 사진촬영이 불가능해서 사진은 김혜리 기자님 트위터에서 가져왔다. 지나온 시간을 애써 헤아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소중한 일상이 되어버린 필름클럽이 벌써 6주년을 맞이했다니. 게다가 6주년 이벤트를 아주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흥분된다. 이제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신청 당시 요청했던 질문도 채택됐고 보너스 상품이었던 인형도 받았고 나한텐 적을까 살짝 걱정했던 단체 맨투맨 사이즈도 심지어 넉넉하다. 그래도, 그래도 딱 하나만 더 바란다면 지금보다 더 가늘어져도 좋으니 그저 길게만 필름클럽이 유지됐으면 한다는 것. 이 바람은 모든 클러버들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세 분의 영화 수다에 오래오래 귀를 기울이고 싶다. 정말 오래오래.


12/18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_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직접 본 뮤지컬 배우들 중 박강현이 노래를 가장 잘하는 것 같다. <모차르트> 10주년 공연과 <하데스 타운> 초연, 무엇보다 이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까지 그의 캐스트로 관람하게 되면서 어떤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기술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그의 가창은 그 어떤 무대와 캐릭터도 살리고야 만다. 뮤지컬 배우의 단독 콘서트를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여태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박강현의 개인 공연은 기회가 된다면 꼭 가고 싶다. 공연 전반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하고 싶지도 않고... 이건 약간 아무 말 대잔치스러운 호기심인데, <웨스트~>로 첫 뮤지컬 영화에 도전해 나름 성공한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번 한국 공연을 봤다면 과연 뭐라고 평했을까. 조금 더 유치하게 말해볼까. 이번 <웨스트~>와 '토니'는 박강현이란 배우를 만난 것에 진짜, 진짜로 감사해야 한다.


12/23 <창밖은 겨울>_인디스페이스

그럴 때가 있다. 분명 닫아 놓았던 문인데 그 문이 어쩌다 반쯤 열렸을 때, 그 사이로 보이는 내 과거에 시선이 고정될 때가. 그런 걸 두 글자로 '미련'이라고 하는데, 그 미련이라는 무용한 것에 다시 미련하게 매달리고 싶을 때가 생긴다. 내게 공기사(곽민규)는 끝난 사랑 때문에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라 끝난 꿈 때문에 방황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침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규칙적인 삶이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사람. 한때 영화감독으로서 많은 '액션'을 외쳤겠지만 탁구 게임에서의 랠리처럼 즉각적이고 성실한 '리액션'을 더 기다렸던 사람. <창밖은 겨울>은 그런 사람의 다소 감성적인 고민을 디테일한 생활 묘사와 함께 정갈하게 스크린을 수놓는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영화 같다는 말은 2022년에 첫 장편영화를 내놓은 감독에게 칭찬일까 욕일까. 영화를 보며 자연스레 두 작품을 떠올렸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박흥식 감독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연출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애(한선화)의 생기가 <8월의~>의 다림(심은하)과 <나도 아내~>의 원주(전도연)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허진호도 박흥식도 더 이상 본인들의 데뷔작 같은 영화는 만들지 않고 만들 수도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 시절 멜로영화들이 전설 속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창밖은 겨울>은 지금 세상에서 뜻밖에 만난 동화 같은 멜로영화다. 반가웠다. 공기사와 영애가 변함없이 탁구 게임을 하고 귤을 까먹으며 MP3 플레이어로 노래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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