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보곤 했다.
죽음과 나 사이의 관계와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에 일어나는 인지와 존재의 소멸에 대해.
사람은 늙어간다라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듯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나는 반드시 죽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기에 '죽음'을 없는 일인 양 모른 척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가끔은 죽음을 망각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당연하게 내일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이 날이 그랬다. 사촌동생의 비보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어여쁜 내 사촌동생은, 2년 전 이제 막 21살이 된 어느 날 겨드랑이 부근 가슴에 딱딱한 것이 만져져 병원을 방문했고,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암세포는 이미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된 상태였다. 바로 항암치료에 돌입했다. 사촌동생은 내가 기억하는 4, 5살 어린아이일 때부터 온유함과 포용하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 큰 특별한 성품을 지녔었다. 그 가족들 안에서도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이 묵상하는 아이였다.
사촌동생은 암진단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투병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본인이 겪는 아픔과 치료를 사람들과 글로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 항암치료는 고통스러웠다. 눈물을 쏟고 좌절하며 하나님께 잠깐 원망의 마음을 쏟아냈다가도, 바로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투병생활을 해나갔다. 오히려 주변 가족과 지인들을 위로하며, '나는 괜찮아. 견딜 수 있어', '좋아질 거야'라며, 꺾이지 않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여러모로 의젓하고 대견한 아이였다.
사촌동생의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바쁜 회사생활로 자주 만나지 못했다. 아니, 거의 보지 못했다. 1년 후엔 Covid-19가 발발하면서 더욱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이직하기 직전인 2021년 4월 어느 날, 드디어 시간이 비어 사촌동생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근황을 나누면서 그 아이는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대학교를 휴학하면서 뒤쳐지게 된 것에 대한 불안함, 요즘 그림에 취미를 붙이고 있는데 카카오톡의 이모티콘 작가로 도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여느 20대 대학생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리고 어릴 때 가족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아버지를 이제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길 바라신다는 마음도 나누었다.
이후 이전보다 더 바쁜 회사에서 일하게 되어 카톡으로만 근황과 안부를 묻다가, 10월 어느 날, 섣불리 만나자고 하기 어려워 다시 안부를 묻는 내 문자에 최근 받고 있는 치료가 가장 힘들다며, 방사선 치료 이제 끝났으니 회복할 일만 남았다는 답변이 왔다. 동생에게 '계속 기도하고 있다'라고 했고, 그 아이는 기도 덕분에 여기까지 버틴 것 같다며, 계속 기도하자며 회복이 좀 더 되면 만나자고 했다. 건강한 모습으로 조만간 볼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도 그 문자가 우리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될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정확히 그 후로 한 달 뒤, 어느 날 아침 분주하게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친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사촌동생이 병원에서 위독한 상황인데 임종이 임박한 것 같다며.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휴대폰에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떨렸다. 그 후로 사촌동생이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좋아지면 만나자는 문자는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었다.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이전에 다 돌아가셨지만 그때도 죽음에 대해 마음이 미어지는 큰 슬픔은 느껴보지 못했다. 어린 사촌동생의 죽음은 내가 마음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이 느낀 첫 번째 죽음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사촌동생의 비보 소식은 마치 어떤 사람의 인생이 담긴 책의 책장을 넘겼더니 다음 페이지가 텅 빈 상태로 끝나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이상 채워지지 않고 '거기까지'로 끝났음을 마주하는 것 같은 공허함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하나님 곁으로 갔다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육신의 끝은 죽음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 이후 Next chapter가 존재한다는 소망이 내 마음 안에 실제했다. 인생의 수평선 너머에 언젠가 도달하게 될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그 전의 삶이 그려내야 할 스토리가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 오늘과 내일이 구분되어 반복되는 삶의 시간 프레임 속에서 우리가 내일을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을 당연스레 여기며 사는 것이 맞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오늘과 내일의 반복 속에 소망을 가지는 것은, 다가올 죽음과 그 이후의 소망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한 습작인 걸까? 그렇다면 내게 남은 '오늘'의 연습장은 얼마나 남은 것인가.
아니면 매일 주어지는 '오늘'은 그날이 오기 전까지 연주해야 하는 전주곡인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인가. 의욕없이 같은 음, 같은 마디를 질리도록 치고 있어선 안되지 않는가.
내 삶의 어떤 곡조를 뽑아내며 그 시간을 맞이하길 기대하는지, 세상적인 관점이 아닌 믿음의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과 그 소망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지어야 할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