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는 법

by 제이와이

기본적으로 나는 '상사 복'이 있는 사람이다.

왜냐면 거쳐온 상사들 모두 무언가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내 상사들 중에서 소위 말하는 분조장(분노 조절 장애)이나, 부하직원 성과를 자기 것으로 가로챈다거나, 무능력하게 책임을 떠넘기는 빌런들은 없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뿌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회사가 보기에 자발적으로 매우 헌신하며 일하는 직원이었고, 상사들에게는 매우 든든한 아군이었다.


지금부터 설명하려는 내용은 모든 상사에게 통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따라 하고 싶은 내용도 아니다.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1. 상대방은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상사여야 한다. 빌런한테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다.

2. 상대방은 회사 일에든, 회사 밖의 삶이든 '성과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는 상사여야 한다.

3. 당신은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4. 당신은 본인 영역이 아니더라도 팀 차원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들 의지가 있어야 한다.

5. 당신은 야근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문제 해결을 위한 야근도 손해'라는 사고가 없어야 한다)

6. 상사가 가진 운신의 폭을 이해해야 한다.(내가 원하는 걸 무조건 상사가 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모든 것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1번과 6번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남이 떠먹여 주기를 기다리거나, 주는 것 없이 요구해서는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내가 여러 후배들에게 조언했던 건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보여줄 것과, 상사가 본인에게 빚진 기분이 들도록 부채의식을 쌓아라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성과중심적으로, 스마트한 상사들은 모두 다 그 밑에서 실무일을 하는 당신보다 더 바쁘고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상사가 팀관리에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현실적으로 수많은 우선순위들 중에 팀원 개인의 업무 환경 개선에 대한 문제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그것도 상사가 모든 걸 팀원이 기대하고 바라는 대로 맞춰주길 원하는 건 좀 이상한 마인드다. 팀원은 상사 1명만 바라보지만, 상사는 여러 명의 개성도, 바라는 것도, 능력도 제각각인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팀장이 더 많이 돈을 받지'라고 합리화하는 생각이 있다면 그건 팀원 개인의 매우 자기중심적인 관점이다.

팀장, 부서장 등 상위 레벨의 직책은 성과를 만들어내라는 압박을 받는 자리이지, 돈 더 받는 대가로 베이비시팅하라고 주어지는 자리는 아니다.


예를 들어, 워라밸을 할 상황이 되지 않는 회사에서 워라밸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최소한 본인의 업무 범주 내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일부 기간 동안 야근으로 좀 희생을 하더라도 업무 효율화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A회사로 이직을 하고 한 달이 되었을 때부터 밤 12시 넘어 퇴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IT부서에서 외주 개발자 8명을 통해 온라인 플랫폼 운영을 관리하는 신설된 팀의 팀원으로 채용이 되었었는데,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었다. 그전까지는 업무 거버넌스가 없어 온갖 비즈니스팀 담당자들이 중구난방으로 개발 요청을 하고, 외주 개발업체 PM이 그 요구사항에 ad-hoc 대응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A사로 합류했을 때 회사는 또 다른 대형 구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나도 거기에 한 축으로 연결되어 관련 개발 건들을 대응했어야 했다.

이 내용만 해도 1명은 커녕, 2명이 일하기에도 많이 버거운 업무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종일 온갖 비즈니스팀에서 온라인 플랫폼에 단발성 이벤트를 하겠다며 개발해 달라는 미팅에 불려 다녔는데, 요청을 받으면 개발자 한 명은 기존 계획되어 있던 개발 작업을 뒤로 미루고, 2주 정도는 그 이벤트 개발해야 했다.


여기서 포착된 문제점은, 백오피스에 개발 없이 가져다 쓸 수 있는 이벤트 프레임이 없으니 비즈니스 담당자들은 제약 없이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나, 과거에 했던 방식에서 계속 변형된 이벤트 개발 요청을 해온 부분이었다. 첫 번째는 비즈니스팀에서 이벤트를 기획할 때마다 요구사항과 일정조율을 위해 여러 차례의 미팅과 개발자들과의 검토를 핑퐁 하는데 들어가는 내 시간이 너무 컸다. 두 번째로는 일회용 이벤트 개발을 지원하느라 다른 개발이 뒤로 밀리는 것인데, 개발된 결과물은 한번 만들어 두면 수차례 재활용이 가능한 자산으로서의 가치실현이 되어야 하는데 한번 쓰고 버려지는 개발 리소스는 ROI측면에서도 너무 아까웠다.


과거 2년 치 이벤트 스킴을 분석해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조건 유형 패턴을 정리한 후, 이걸 표준화된 기능으로 만들어야 더 이상 현업에 요구하는 대로 이벤트 개발하는 일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결론이 서자, 내가 지금까지 이벤트 요청으로 인해 소비한 시간, 누적 개발 리소스, 표준화 방향 등을 정리한 내용을 가지고 상사를 찾아가 프리랜서 개발자를 프로젝트 목적으로 한 명 계약해서 2개월 정도 이벤트 플랫폼을 만들 수 있게 승인해 달라고 했다.

상사는 내 요청은 들어줄 수 있지만, 이미 지금도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까지 하는 건 너무 힘들지 않겠냐고 했다.

나에게 끔찍한 것은 이걸 만들지 않고 앞으로 이 비효율을 떠안고 쓸모없는 업무 경험으로 채워진 시간을 길바닥에 내다 버리며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인데, 차라리 딱 눈감고 2개월 동안 지금보다 매일 2, 3시간 더 야근해서 이벤트 개발 비효율을 완전히 종식시켜 버리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운 좋게 실력 있는 개발자를 찾게 되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게 되었다.

매우 고생스러운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했지만, 그래도 이벤트 개발로부터 완전한 해방이라는 결실을 얻었다.


비즈니스팀에는 프레임 내에 지정된 조건 패턴 범주 내에서 이벤트를 기획해서 요청서를 작성하도록 일하는 방식을 바꾸었고, 그 기준으로 개발 없이 세팅으로만 이벤트 만들어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에 요구사항 정의부터 개발까지 2주나 걸려서 론칭하던 이벤트가 3일 만에 처리될 수 있는 구조가 되니, 비즈니스팀도 적시에 이벤트를 기획/론칭할 수 있게 되어 더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시간을 희생하기로 결심하지 않았다면 이 비효율은 제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벤트 표준화 개발을 수행하는 동안 과도한 업무량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 사이 이미 내 상사에게 한차례 한 달간 내가 진행한 업무 리스트와, 작업 스케줄을 시간 단위로 정리해 공유를 했었다. 그러나 전사적으로 신규 TO를 프리징 하라는 공고가 내려와서, 상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슬슬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을 때 마침 한 달 사이 옆팀에서 2명이 퇴사를 했다. 3명이 한 팀인 조직이었는데 퇴사한 2명은 그냥 칼퇴뿐만이 아니라 근무시간에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 때우기를 하고 있고, 본인도 그런 상태임을 언급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들이 떠난 포지션은 그대로 채용공고에 오픈이 되었다. 그걸 보자마자 난 상사에게 가서, ' 나는 허덕이며 일하고 있는데, 저 팀은 모두가 여유롭게 일해왔고 그 공석 2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건 말이 안 된다. 저 TO 중 하나를 이쪽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해달라'라고 요청했다. 내 상사는 발 빠르게 움직였고 나는 입사한 지 4개월 만에 아래의 변화를 얻었다.


1. 팀원에서 팀장으로 승진이 되었다.

2. 옆 팀의 TO가 내 팀으로 넘어왔다.

3. 지인 추천을 통해 한 달 만에 새로운 팀원을 영입했다.


1~3은 내가 아닌, 내 상사가 만들어준 기회였다. 특히 승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변화였는데, 상사가 어느 날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하더니, 윗분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설명하며 한 달 뒤 바로 나를 승진시키기로 했고 TO도 가져왔다고 했다. 정식 채용절차를 거치면 3개월 이상 걸릴 수 있으니, 가장 빨리 사람을 확보하려면 지인 중에 일 잘하는 사람을 추천해서 면접을 보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때마침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후배가 한 명 있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한 달 후 그 후배가 내 팀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둘이서 하기에도 많은 업무량이라 같이 거버넌스를 잡아가며 계속 효율화하는 일들을 진행했고, 덕분에 칼퇴 수준의 워라밸을 아니지만 주중에 일부는 저녁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수준까지 정상화가 되었다.


어느 상사나, 고객을 만나서 일을 하던지 이러한 접근은 안 통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내 경험 범주에서는 무조건 적으로 효과적이었다.


어느 정도 나에게 빚진 기분을 지게 된 상사들은 내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 바로 당장은 아니더라도 담아두었다가 기회가 될 때 떠올려줬다.

그 기회도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지라, 제안받을 시점에는 그 요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경우들도 많았지만 그런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인정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