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규칙의 범위
우리는 개발 여행을 떠나기 전, 일 하는 시간을 정했다.
아침 10시에 업무 시작 하고, 저녁 7시에 끝내자.
우리는 맨날 서울에서 하던거니, 정말 잘 지킬줄 알았다.
하지만 단 한번도 지킨적이 없다. 8개월간 단 한번도.
하지만 현재 프로젝트 개발은 순항중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어떻게 시간 문제를 해결해나갔는지, 우리가 어떤 규칙을 세워나갔는지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해외에서 이동하면서 일 할 때, 제일 먼저 느낀것은 "도대체 내가 몇시간 일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다.
회사를 다닌다면, 10시에 출근해서 7시에 퇴근할때까지 9시간(점심시간 1시간 제외하면 8시간) 일 하는것이 명확하다. 하지만 돌아다니며 일하면, 일 하는 시간을 가늠하기 정말 어렵다.
일 하다가 불편해서 다른곳으로 옮기기도 하고, 전원이 끊기기도 하고, 택시 아저씨가 목적지까지 삥~ 돌아서 가기도 한다. 밥집 찾는데도 한나절이고, 음식 안맞아서 옮길때도 많다. 이런저런 핑계를 다 수용하다보면 일 하는 시간은 한국에 있을때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이대로라면 사실상 외국에서 일 하는것은 불가능. 가장 좋은 해결책은 이런저런 규칙을 정해놓고, 못지킬 경우 책임을 묻는 '창살 없는 외국 감옥' 형태로 변해야 하는데, 그렇게 재미없게 일 할거면 세계여행 떠나는 의미가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정확한 진단이 우선시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Google Docs를 썼다.
하지만 업무를 Google Docs에 적는건 너무 귀찮았고, 작성을 까먹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일주일씩 몰아서 쓰는 경우도 생기는데다가, 업무 시간을 다른 팀원들에게 보여주는것도 불편했다.
그래서 그냥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었다.
우리는 30분마다 "거기 있니?"라는 팝업이 노트북에서 뜨게 했다. "응. 일하는 중이야"를 클릭하면, 일하는 시간이 기록된다. 이 기록은 다른 팀원에게 공유되지 않으며, 오로지 본인만 볼 수 있다.
저 팝업이 정말 좋은게, 팝업 두 번 뜨면 1시간 일한거니, 잠시 머리좀 식히러 나갔다 오기 딱 좋다. 저렇게 기록된 데이터는 아래와 같은 달력 화면에서 볼 수 있다.
아예 체크가 되지 않은 6월 11일, 17일, 27일, 30일은 노트북 조차 열지 않은 날이다. 0.5시간으로 찍힌 4일, 9일, 21일은 노트북만 열어본 날이다. 15일, 16일, 17일은 보아하니 어딜 놀러간 모양인데, 놀라가서 잠깐 작업을 했나보다. 그게 좀 팀에게 미안했는지 18일엔 하루 12.5시간을 일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얼마나 일을 안하고 놀고 있는가"를 스스로 진단하기 위해서 만든 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을 동작 시킨 이후로 업무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안나왔다.
저 달력에 써 있는 숫자를 올리기 위한 (아무도 보지 않고 나만 보는 데이터임에도 불구!!) Gamification이 동작을 한것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상태 진단을 위해 작성한 프로그램이 치료까지 해줬다.
우리가 2017년 8월에 쿠바로 넘어가서는 인터넷 환경 때문에 프로그램이 동작을 안했는데, 일하는 관성이 붙었는지, 저 프로그램 없이도 더 이상 "우리가 일을 적게 하는것 같다"라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이틀 쉰다. 대신 그 휴일은 우리가 정한다. 토/일요일에 일하고, 화/수요일에 쉬는식이다.
그러다보니 우리팀에게 이미 요일 개념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래서 이번주엔 수요일/목요일에 쉬자" 보다는, "이틀 뒤 쯤 쉴까?"정도 수준. 가끔 길가다 팻말에 "일요일 휴무"등이 써 있는 음식점을 보면, "그래서 일요일이 언제지? 오늘인가?"라며 달력 열고 계산해봐야 한다. 너무도 당연히 업무 복귀 스트레스인 "월요병"따위는 없다.
우리는 쉬는날 보통 "하루를 통으로 써야 놀 수 있는것"을 한다. 고래를 보러가고, 수영을 하러 가고, 마야유적지를 찾아간다. 이렇게 지내다보니 한국에서 주말에 플스 붙잡고 보냈던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주 5일 근무를 꼭 지키진 않는다. 몰아서 쉬기도 한다.
아이슬란드를 한 바퀴 돌기 위해선 최소 5일 연속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아이슬란드에선 15일 연속 근무를 한 다음에 6일을 쉬면서 한 바퀴 돌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정한 날만 쉬는건 아니다. 퇴근시간 이후 활용도도 엄청 높다. "퇴근후에 이걸 꼭 할꺼다"라고 정하면, 그날 업무 능률도 덩달아 올라간다.
우리는 보통 공연을 보러 가며, 동네 유명한 공원이나 야경등도 많이 보러 간다.
누군가 공연 예매를 하면, 다른 멤버가 그 공연장 근처에서 일 하기 편한 까페를 찾는다. 요즘은 코워킹스페이스도 많아서 업무공간 찾기 편하다. 하루 만원 수준. 정말 일 할곳 없으면, 스타벅스 찍고 가면 중박은 친다.
그리고 거기서 폭풍같이 일 하고, 깔끔하게 공연보고 집에 온다.
나는 한국에선 1년에 한번 뮤지컬/연극등을 갈까 말까 수준이였다.
한국에선 일 끝나면 퇴근하기 바빴고, 지하철에 앉아서 클래시 오브 로얄 하기 바빴고, 인터넷 기사 보면서 남들 이야기 읽기 바빴다. 한국에선 남는 시간에 연예인 걱정해주고 그랬는데, 여기선 그 시간이 나를 위한 문화생활로 바뀌고 있다.
사실 우리팀이 이 분위기까지 정착되는덴 세달쯤 걸린것 같다.
반대로 말하면, 첫 세달은 쉬는날 정하는데 정말 골치가 아팠다. 노는 방법을 찾는데도 정말 힘들었다. 처음엔 우리끼리 마음대로 쉬는날을 정할 수 있다는것에 신나서, 수/목을 고정으로 쉬는날로 정했고, 토/일을 업무날로 정했다. 주중에 쉬면 휴양지등에 사람들이 별로 없을것 같아서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니, 놀때도 각자 놀기로 했다.
그런데 남들이 쉬는날에 일한다는것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토요일/일요일에 업무 능률이 바닥을 쳤다. 그렇게 업무 능률이 떨어지니, 노는것도 흥이 안났다. 차라리 안놀고 일을 하는게 마음이 편할정도였다. 그 분위기에서 혼자 놀러다니자니, 여행다니는 맛도 안났다.
그래서 다시 토요일/일요일에 쉬고, 월/화/수/목/금에 업무를 하기로 바꿨는데, 좀처럼 팀 분위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한건 새로운 개발자의 영입이였다. 우리는 개발자를 추가하겠다는 공지를 냈고, 가장 유쾌하게 자기소개서를 쓴 친구를 새 멤버로 맞아들였다. 이 친구가 팀에 들어오자 분위기는 엄청 살아났다. 이 친구가 우리팀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 역시 사람이 제일 중요한것 같다.
그리고 그 뒤로 두명을 추가모집 했는데, 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게 "개그 센스"였다.
1994년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선 14명의 자원자를 바탕으로 실험을 했다. 자원자들을 밝은 빛에 노출되지 않은 곳에서, 시계없이 며칠 동안 가둬놓고 관찰을 한 것이다. 관찰 결과, 지원자들은 약 24.5시간을 기준으로 하루를 보냈다. 즉, 이 연구에 따르면 우리몸은 24시간이 아닌, 24시간 30분을 하루로 인식하는것이다. 우리가 점점 늦게 잠들게 되는건, 스마트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몸뚱아리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인것 같다.
즉, 등교나 출근 같은 강한 생활 규칙이 있지 않는 이상 점점 생활리듬은 뒤로 밀리게 된다. 우리는 자정에 잠들다가, 1시에 자게 되고, 2시에 자게 되고, 3시에 자게 되고, 4시, 5시 계속 밀려서 잤다. 차마 해뜨고는 잠들고 싶지 않아서 5시 정도에서 데드라인이 유지되었다. (지금도 새벽 4시 20분...)
여기서 생활 리듬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1) 아침에 알람을 맞춰서 일찍 일어난 다음, 몸이 피로를 빨리 느끼게 하는것. 2) 아니면, 우리가 서쪽 나라로 이동 하는것.
우리는 (의도치 않게) 후자를 선택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서쪽으로 이동한건 아니다. 처음엔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뉴질랜드에서 남미가는 비행기값이 너무 비싸서 다시 동남아로 돌아왔는데, 신기하게 긴 이동에도 불구하고 피로감이 덜한것이였다. 잠도 잘 오고. 한참 잤다고 생각했는데, 아침 8시에 깨고 그랬다.
아예 시차가 7시간, 9시간씩 차이나는 나라로 한방에 점프하는것이 아니라, 1시간 2시간씩 차이나는 나라를 묶어서 이동할땐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게 피로가 덜 쌓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동유럽쪽인 헝가리에 있으며, 점점 서쪽 유럽으로 옮기고 있다.
팀 안에 규칙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미뤄지는 취침 시간은 나라를 이동하면서 해결하는것으로.
세상 제일 편한건 지켜야 하는 규칙을 다 정하는 것이다.
아침 10시에 업무 시작. 저녁 7시에 업무 종료. 토요일/일요일에는 쉬고, 퇴근 후 업무공유도구로 서로 확인. 기상시간 정하고, 샤워시간 정하고, 밥 시간 정하고.
하지만 규칙은 규칙을 낳고, 위반하는 경우에 대한 또 다른 규칙을 낳는다.
아침 10시 시작을 지키지 않으면 뭐 해야 하고, 퇴근 후 업무 공유 안하면 어떤 패널티를 줘야 하고, 누가 샤워길게 해서 팀이 늦으면 부담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게 규칙속에 살던건 우리팀이 서울에서 일했던 방식 아닐까. 그렇게 규칙만을 따라서 사는걸 탈출하고자 나온 개발여행에서 조차 룰을 계속 만들어 나가긴 싫었다.
우리팀은 그렇게 지내고 있다. "10시에 업무시작/7시 업무 종료"를 아무도 안지켜도 꾸준히 업무가 진행되면서 잘 놀고 지내고 있다.
언제나 규칙은 최소화. 우리를 만들고 있는것은 규칙이 아닌 팀 문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