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자리
방직공장 쉬는 시간이 되자 여공들은 서로 시집을 어느 곳으로 가게 될지 묻는다. 철없지만 옥구슬처럼 밝고 맑은 목소리들이 부딪힌다. 득무는 가만히 그 속에 섞여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전라도!"
"나는 경상도!"
혜자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한다.
"난, 강원도거든? 내가 제일 멀리 가거든? 그러니까 내가 이겼다!"
여공들은 배를 잡고 까르르 웃는다. 이들은 지금 시집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단기 여행 즈음으로 여기고 있다. 결혼이 무엇인지,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 실체에 대해 골똘히 행각해 볼 여유가 없는 어리고 바쁜 인생들이다. 득무도 그 사이에 껴서 머릿속으로 자신은 어디로 시집을 가게 될지 떠올려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적어도 자신은 아버지같이 얼굴만 반반하고 신의 없는 인간은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득무를 방 안으로 부른다. 평생 행상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어머니였다. 득무가 기억하기론 어머니는 그녀에게 옷 한 벌 지어준 적이 없었고, 따스한 밥상 한 번 차려준 적이 없었다. 득무는 이른바 부모에게 애정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언니들이 더 따스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머니의 강인한 체력과 흔들리지 않는 감정선은 집 안에 어른이 있음을 늘 상기시켜 주었고 어딘지 모르게 자기도 엄마처럼 씩씩하고 건강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무의식 중에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득무를 따로 불러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은 매우 중차대하고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장 다니는 거 그만둘 생각 하라."
어머니는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며 저만치 떨어져 앉은 득무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용건을 꺼냈다.
"왜...그러셔유?"
득무의 말에 어머니는 바느질을 놓고 이쪽을 바라본다.
"이제 둘째 미자 혼례 곧 치르고 나면 너만 치우면 끝이다."
딸을 치운다는 말을 하다니. 득무는 내심 서운하다. 다른 이들이 이 집 딸들 혼사를 늦게 주선해서 혼례 길을 막는다라고 말하거나, 선자리가 들어와도 어머니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때에는 평소 저에게 따스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부모라 하더라도 저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는 것이라 생각해서 마음 한 구석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자신이 짐짝도 아니고 이제 나만 치우면 끝이라니.
"... 내일 모레 일요일에 저 아래 김약국네 아저씨가 주선한 사람이 한 명 올 거다.
그때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조신하게 이 옷 입고 앉아 있어. 나가보라."
득무는 어머니의 새까매진 손이 바쁘게 호롱불 아래로 바쁘게 움직이는 모양을 계속 바라보다 방문을 닫았다. 김약국 아저씨라면 아들들을 일제시기 전부 일본으로 유학 보내고 며느리들도 학교 선생이나 무용 교사로 들인 꽤나 신식인 집안 아닌가. 갑자기 득무의 마음 한 구석이 들썩인다.
'혹시 나도 책 좀 읽고 바깥 물 좀 먹은 양반을 만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신여성이라도 되는 걸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여 설거지를 하다 말고 피식 웃게 된다.
그때 언니 미자가 마당으로 들어서며 득무를 부른다.
"득무야. 너 엄니한테 얘기 들었지?"
"응..."
"다름이 아니라 그 선자리 내가 고모한테 부탁햐서 주선한 거여. 그러니께 잘 해야 혀?"
"뭐? 언니가?"
"나 인자 시집가면 엄니하고 니 혼찬데, 엄니는 혼자서도 잘 헤쳐나가실 분인디...너는 우리 둘 다 떠나고 혼기 넘어가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수 있단 말여. 나는 득무 니가 참말로 걱정이랑께."
언니의 말을 듣고 보니 다음 달 혼례가 있고 나면 집 안에 자신이 정을 붙였던 두 사람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 집안에 혼자 있을 자신을 떠올리니 싫다. 그렇지만 어머니도 나이를 드셔 가는데, 자신마저 혼사를 치르게 된다면 혼자 남은 어머니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고모가 김약국 아저씨를 잘 안댜?"
"그건 모르겠고... 선자리가 외국물까지 먹은 냥반이라던디?"
"외국물? 공부 좀 했댜? 나는 낫 놓고 기역 밖에 모르는디..."
"고모가 이미 너 보통학교 배우다 나왔고 생활력도 있는 데다 평소에 책 읽는 게 취미라 했댜."
"그건 그짓부렁이자녀! 내가 뭔 책을 읽어!"
얼굴이 새빨개진 득무가 미자에게 소리를 내지르자방 안에서 어머니의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미자가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고는 득무와 함께 설거지를 시작한다. 사발그릇의 기분 좋은 부딪힘과 두 자매의 다정한 대화가 이어진다.
김약국은 해사한 얼굴로 앉아 옥분과 그 앞에 짙은 갈색의 양복을 입고 앉아있는 재원을 번갈아 본다. 옥분은 재원을 번뜩이는 눈으로 이리저리 잡아먹을 듯 뜯어보고 있다. 재원은 그런 옥분의 시선이 부담스럽지만 차분하게 자신의 약력에 대해 설명 중이다.
"자자 식혜 좀 드시고오."
김약국이 미자가 가져온 식혜를 한 입에 털어 넣는 동안 재원은 옆 동네 이상득 씨 둘째 아들로서 자신이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대소서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과 명필로 유명한 할아버님을 두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김약국을 통해 소개를 받은 처자이기에 믿고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차분히 설명했다. 재원의 검고 짙은 눈동자와 흰 피부는 그의 정갈한 이목구비를 더욱 뚜렷하게 했고 그의 차분한 말투에는 기품이 깃들어있었다.
미자는 부엌으로 돌아와 쪽문을 열어젖혔다. 부엌과 연결된 웃방에는 며칠 전 옥분이 손바느질을 했던 그 색동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은 득무가 새초롬히 그러나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어떻데?"
"야! 너 팔자 폈다. 세상에... 이름만 잘 생긴 줄 알았더니..."
"잘 생겼어?"
득무의 얼굴에 살짝 긴장된 기운이 스친다. 미자가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데는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집안으로 시집을 가지만 남편 될 사람이 꽤나 박색인 이유도 있을 터. 득무는 얼굴만 반반하고 신의가 없는 제 아버지가 떠올라 입안이 쓰다. 미자가 숨 가쁘게 이야기를 이어 가는데 부엌으로 옥분이 들어서며 미자의 등짝을 세차게 때린다.
"득무 나오너라."
득무는 목 안이 까칠해지는 것을 느끼며, 평소 신지 않던 흰 고무신을 신고 마당을 가로지른다. 그 길이 구만리나 되는 것처럼 길다.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너무 평소의 자신 같지 않고, 민망하여 땅 속으로 가라앉아 숨고만 싶다. 첫째 은자가 시집을 가고 나서 매번 남편에게 매를 맞아 한 달에 한 번씩은 젖먹이를 달고 울면서 집으로 오는 것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미자가 먼 마을로 시집을 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도 다 싫다. 게다가 자신마저 시집을 가게 된다면 은자와 미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그렇게 그리 멀지도 않은 앞마당을 어렵사리 지나 재원이 앉아있는 댓돌 위 마루에 이르렀다.
"아이고 오늘따라 더 어여쁘시네."
명랑한 김약국의 말이 이어지자 득무는 양 볼이 붉게 물들어버린다. 그냥 이 자리에서 사립문을 열고 도망을 칠까. 아니면 어머니에게 자신은 아직 혼례의사가 없고 김약국 아저씨가 소개한 대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고운 처자도 아니니 그만 시간 낭비하시고 돌아가시라고 할까. 득무는 복잡한 마음으로 얼떨결에 고개를 들었을 때 재원과 눈이 마주쳤다.
"..."
초여름의 미풍이 나무를 흔들어 청량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기분 좋은 재원의 엷은 미소가 득무의 눈에 들어섰다. 득무는 귀까지 새빨갛게 되어 고개를 숙였다. 언니의 말대로 재원은 너무나도 미남이었다. 얄상한 뿔테 안경, 포마드를 발라 정갈하게 넘긴 머리에 허리를 세우고 바르게 앉은 모습은 그야말로 모던보이의 모습이었지만 어떤 세상 선비보다 더욱 단아했다.
"안녕하세요."
재원의 목소리가 득무의 귓가에 물방울처럼 울려 퍼졌다. 득무는 고무신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옥분 옆에 둔 방석 위에 다소곳이 앉는다. 이상하게도 자꾸 등에서, 목에서 식은 땀이 난다. 이쪽을 잠깐씩 바라보는 재원의 시선이 느껴져서일까. 자신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침만 꼴깍 꼴깍 삼키고 있는 꼴이 우습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옥분은 득무에게 이제 그만 가보라고 손짓을 했고 재원은 희미하게 웃었던 것 같다고 득무는 기억한다. 그날 득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만을 두고 어떻게 이 집을 떠나냐고, 은자와 미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던 득무는 이제 없었다. 다만, 앞으로 남은 하늘의 별과 같이 생때같은 날들을 재원과 함께 할 생각에 잠겼다. 오늘의 이 순간이 나중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기억될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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