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없는 할머니 이야기

워킹맘의 러닝일기 8

by 여름타자기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정말 어렵다. 나는 할머니를 잃고 그녀에게 대해 더 골똘히 생각한다. 못된 일이다. 28년생인 할머니는 일제시기,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과 초대 대통령 선거부터 작년 봄의 정치적 격동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버텨내셨다. 그리고 작년 봄 구십칠 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사실 나는 그녀와 그리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적으려는 것은 그녀가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같은 사람과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기억한다. 기억의 빈 곳을 채워나가다 보면 여러 가지 방향으로 이야기가 각색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확실한 것은 그녀는 주어진 삶의 조건을 온몸으로 버티어내었던 씩씩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겪었을 수많은 인생의 굴곡과 우여곡절, 그리고 그보다 더 컸을 그녀만이 알고 있을 오롯이 그녀 것이었을 세계. 그것들은 전부 사라졌다. 과거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시간은 선형으로만 흐르는 것일까.

씩씩했던 그 세계는 어딘가에 남아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나에게 다 괜찮다고, 살아내라고 응원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오늘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질 못한다. 어제의 걱정을 이고 지고 걷기보다 조금 빠르게, 그러나 누가 봐도 아주 느리게 뛴다. 나는 그녀처럼 씩씩하지 못하다. 기분에 따라 선택이나 태도가 흔들린다. 나는 할머니의 인생을 내 방식으로 바라보면서 그녀를 추억하고 싶다. 아니, 그녀의 세계를 남기고 싶다.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시간은 선형으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할머니 없는 할머니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베토벤 없이 베토벤 음악을 듣지 않는가. 그리고 그를 느끼지 않는가. 거기에 그는 살아있다. 각자의 계절과 시간으로.


삶이 벅찰 때에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법이다. 할머니는 말년에 혼자일 때가 많으셨는데 그때에는 어떻게 견디셨을까. 어떻게 그렇게 씩씩하실 수 있으셨을까. 아니다. 그녀도 외로웠을 것이다. 알아주길 바라셨을 것이다.



숭고. 그렇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녀 삶의 숭고함.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의 고귀함. 때로는 가여울 정도로 약하고 깨어지고 완벽하지 못하고 그럼에도 삶이라는 파도를 부서지게 타고 오르내리면서 견디어냈던, 때로는 햇살과 잔잔한 바람과 싱그러운 내음들, 설렘과 반짝임, 젊음, 눈부시게 타오르는 열망이 있기도 했었을 그녀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찾아내고 싶다. 내 마음은 그렇게 마구 달려 나간다. 이 마음이 그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닿을 것이다. (260130)



황폐할수록 더욱 고귀하다.
우리는 모두 한 줌의 부스러기로 끝나겠지만, 이 부스러기는 금으로 되어 있고
때가 되면 천사가 그것으로부터 다시 온전한 빵을 만들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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