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당신 (5)

해방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by 여름타자기

5. 해방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낙들은 까만 머리를 맞대고 다리 아래 개울에 모여 빨래 중이다. 득무도 그 가운데 껴 있다. 형철은 득무 옆에서 물장난 중이다. 몇몇의 아이들이 형철 옆에서 함께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애비. 하지 말여. 깨구락지도 살아야지.”


김천댁이 아이들을 말린다. 영자가 말을 이어받는다.


“깨구리도 장난으로 던진 돌에 맞아 죽고, 우리도 허무하게 총질에 명이 끊어지고. 다를게 뭐유?”

“사는 게 온통 슬픔이네…”

“빨갱이 놈들은 왜 쳐내려 와 가지고”

“정말 우리도 피란을 갔어야 되는 건가.”


여인들은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를 낮춘다.


“그제 인민군이 면서기집을 점령했다던디…그 피란 가고 싹 비어있는 큰집 말여. 행길에 병원에도 짐을 풀고. 우리 남편이 봤다고 그러두만.”

“어젯밤엔 저기 감나무댁에 들이닥쳐서 큰 아들을 데리고 갔댜.”

“용택이를?”

“… 아니 열다섯 먹은 아를 왜?”

“뭐 차출한댔나 어쨌댔나. 수원 오산 길을 고치는데 보냈다고 하두마.”

“세상에.. 일정도 아니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득무가 조용히 옆에 있던 명자에게 말한다.


“인민군이 들어오면 전부 해방 세상이 된다던디?”


그러자 명자가 놀란 얼굴로 “쉿!”한다. 그 모습을 본 열일곱 먹은 주영은 피식 웃고 만다. 득무가 주영에게 말한다.


“집에 와서 감자 좀 가져가. 서방님이 느 집 것도 따로 빼놓으라 하시두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형철은 주영의 치맛자락을 질질 끌어당긴다. 득무는 형철을 혼낸다. 그러자 주영이 웃으며 형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짐니도 힘들겠어유. 우리 형철이가 애 먹여서”

“주영이 니가 간간히 형철이도 봐주구 느네 오빠꺼정 우리집 일도 도와주니께 나야말로 고맙지.”







재원은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선다. 그간 남로당원으로 일해온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를 찾은 것 같아 내심 기쁘다. 운동장에는 겁에 질린 사람들이 열을 맞추어 모여있다. 총을 든 인민군이 재원을 향해 인사를 하고 그는 그들을 가로질러 교실로 향한다.



image.png 출처: 나무위키(6.25 전쟁)




“이동무 잘 왔소. 정오에 재판이 시작되오. 즉결처분 명령인데, 그전에 선고문을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주시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작성되었다는 선고문 뭉치를 받아 든 재원은 내용을 눈으로 훑어본다. 서북청년단, 일제시기와 해방 이후의 경찰과 군인들, 대한청년단 등 각종 집단의 명백한 반동 행위가 쓰여있는 간략한 몇 줄의 선언문. 그들은 사람을 수단으로 본 기회주의자이며 노동자 해방의 방해꾼이자 시대의 반역자다. 정당성 없는 정부의 끄나풀들. 새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이 필요하다. 재원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날 정오 재원은 겁에 질린 몇 십 명의 눈동자들 앞에 당당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선언문을 읽었다. 더러는 재산 몰수와 구금을 당하고 어떤 이는 사형으로 즉결 처분되었다.







그날 저녁 사립문 안으로 들어선 재원은 형철을 업고 마당을 서성이는 주영과 저녁 준비 중인 득무를 마주한다. 주영의 집은 할아버지가 풍으로 누운 지 오래되어 피란을 가지 못하였다.


“어, 주영이 왔느냐.”

“안녕하세요 아저씨.”

“감자 챙겨놨다 갈 때 가져가거라.”


재원은 형철을 살뜰히 챙기고 득무를 도와주는 주영이 고맙다. 재원은 주영의 오빠 채훈의 안부를 묻는다.


“거 채훈이는 대구 가서 소식 없지?”

“…네.”

“뭘 한다고 대구에 갔던?”

“급하게 친척을 만난다고…”

"당분간은..."


재원은 말을 시작하다 곧 멈춘다. 주영은 곧바로 형철을 방에 눕힌 뒤 황급히 감자 광주리를 들고 사립문 밖으로 사라진다. 방 안은 형철과 득무, 재원뿐이다. 재원이 득무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세상에…이 시국에 이런 게 다 뭐 여유?”


득무의 큰 눈이 더 커진다. 재원은 미소를 띠며 말한다.


“소세하고 바르면 예뻐진다더군. 오늘 인민위원회에 다녀왔소.”

“위원회요?”


재원은 대꾸 없이 득무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득무는 인민위원회라는 단어가 무섭다고 생각했으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모진 일제시기도 견뎌내고 뒤숭숭한 해방까지 겪었다. 내 등 따시고 배만 부르면 누가 어떻게 세상을 장악하든 무슨 상관일까. 게다가 재원이 입이 닳도록 말하는 모두가 진정으로 해방을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그리 나쁜 말 같지도 않다.









이튿날 논둑에서 빨랫감을 들고 잰걸음으로 걸어가는 득무에게 명자가 말한다.



“득무야. 내 말이 맞지?”

"니 신랑 빨갱…”


득무가 빨갱이라는 말에 놀라 쉿 하며 뒤를 도는데 흙먼지를 일으키며 군용차 한대가 와서 선다.


“거이 아주머니들.”

“…”




image.png




명자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새로 뽑힌 면서기다. 한낮 햇볕에 그의 이마가 반짝인다.


“오늘 우리 군인 동무들 야간 작업하는 데 먹을 야식을 좀 만들어야겠습니다. 다섯 시에 즈이 집으로 오시오.”


차에 오르며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띠는 면서기가 명자는 기분이 나쁘다.


“어떻게 해. 정말로 인공군한테 나라가 다 넘어간 거야?”

“아무렴 어때. 이놈이나 저놈이나.”

“너 못 들었어? 김천댁 아저씨 어제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즉결처분당한 거. 겨우 시신만 찾았나 봐. 니 서방을 거기서 봤다던데”


어쩐지 오늘 아침 빨래터에서 늘 목청을 담당하던 김천댁이 보이질 않았다. 생각해 보니 빨래터에서 웅성거리던 목소리들조차 득무가 빨래 광주리를 내려놓자마자 그쳤던 것 같다. 제 아무리 둔한 득무여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다. 재원이 인민위원회에서 선고문을 읽는다는 것쯤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일 터.


“집집마다 돌면서 반공분자 있으면 색출해 내라고 난리야. 밤 되면 차출해서 이리 보내고 저리 보내고. 느이집은 니 신랑 덕분에 조용한 줄 알아.”

“…”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아픈 엄마 둘러메든 달구지에 끌고 가든 피란을 갈걸.”

“… 너마저 없으면.”


득무가 말을 하다 만다.


“나 없으면 뭐.”

“너 꺼정 없으면 난 정말 안되어.”

“뭘 안돼. 넌 남편도 있고, 땅도 많고.

그나저나 숙모는 부산에 도착하셨을까?”


득무는 지난주 은자언니가 득무의 엄마와 함께 부산 피란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평택에 들른 친척으로부터 들었다. 득무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알 길이 없다. 궁금하지도 않다. 아버지는 나를 궁금해 하실까. 내가 혼인한 사실은 아시겠지.


“국군 있는데 간다고 해서 별 수 있을까. 대통령이 제일 먼저 도망가버렸는디. 그놈이 그 놈이고 이 놈이 이놈이지. 여긴 배급주는 세상이랴. 평등하게 다 잘 살 수도 있어. 이따 울집 들러서 같이 서기네로 가.”


명자는 그 말을 듣고 입을 삐죽거리며 잃어버린 게 있다며 득무를 앞지른다. 자신을 속이고 결혼한 재원이지만 결혼 이후 작은 잔소리, 험한 말 하나 한 적 없는 사람이다. 출타를 하고 오면 자신의 손에 풀꽃이라도 한 송이 뜯어 쥐어주는 사람. 그런 재원에 득무의 상처받은 마음도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바라는 세상이 과히 나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땅이 뒤집히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바람과 함께 굉음이 날아들었다. 득무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까만 비행기가 손에 잡힐 듯 낮게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포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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