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타자기 Oct 17. 2022

출퇴근 여행 일기 3.-P의 끝맺음

끈기와 조바심 사이.






토스트에 땅콩잼을 바르고 거기에 양상추와 계란 작게 자른 방울토마토를 얹은 다음 이케아 지퍼백에 대충 구겨 넣고 집을 나섰다. 최근 들어 자주 먹고 있는 레시피인데, 스누피에 피넛버터 샌드위치가 자주 나와서일까 나는 이 토스트를 어느새부터인가 '찰리 브라운 토스트'라고 혼자 부르고 있다.


오늘도, 막히는 4차선 도로에서 한 손에 이 '찰리 브라운 토스트'를 들고 있는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날 딱 40분을 잤기 때문이다. 아이는 바이러스와 마지막 배틀을 치르듯 40도 언저리에서 힘겨워했고, 나는 그 옆에서 물수건을 갈으며 오늘이 마감인 연구대회 자료를 작성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냥 안 써도 되지 않냐고. 지금 그걸 할 여유가 있냐고. 하지만, 왜일까 나는 끝을 맺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요사이 mbti가 유행이다. 나는 J가 아닌 극 of 극 P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변명을 좀 하자면, 수업은 계획서 대로 요리조리 다 해놓고 그걸 모아서 보고서를 만드는 일은 좀처럼 착수가 되질 않았다. 아니 아예 보고서를 쓰는 계획이 최근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아도 마찬가지다. 나는 계획을 적으면 그 적은 종이를 잃어버리곤 했다. 그러니 스케줄러 같은 것이 나에게 있을 리가. 하지만 최근 나이가 들면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 서로 섞이고, 세세하게 배려해야 할 부분들을 잊기 시작하면서 정말이지 나는 기록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다 핸드폰 덕분이다. 핸드폰은 어지간해서는 잃어버리기 힘드니까.


그러나 나는 이 일만은 '끝맺음'하는 일을 미루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짬도 없었거니와 그냥 이렇게 저렇게 흘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 같다. 다른 더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하지만 며칠 전 마감일이 이틀 남았다는 전화를 받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난 매번 마무리가 안돼서, 흘려보낸 것들이 너무 많은데 중간 과정도 나에게 의미 있게 남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 과정의 마무리를 한 번 찍어보면 어떨까? '



마흔을 앞두고 무언가 변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이를 재우고 컴퓨터를 열어 커서와 눈싸움을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작게 덩어리로 나누어 일을 준비하는 것의 중요성, 큰 목차를 세우고 작은 것들로 들어가는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전체 얼개를 그리지 않으면 자칫 산으로 갈 수도 있는 일. 보고서를 쓰는 일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나 전체 얼개를 잡아야 하는 것은 같구나.



나는 노트북을 접고는 종이에 목차를 써 내려갔다. 시간이 꽤 걸렸지만, 목차를 작성하자 그 안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머릿속에 슬그머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시간의 문제였지 이미 콘텐츠는 있었기에 커서를 달리게만 할 스태미나만 있다면 정말로 완성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이 보고서는 점수도 없고 내년에도 계속될지 몰라 사람들이 크게 선호하진 않는 대회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상을 타냐 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끝까지 어떤 것을 해보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나는 신중히 타자를 쳐 댔다. 몇 번 머리를 찧으며 절망하기도 했으나, 새벽 3시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다시금 나를 힘을 내게 해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의 열은 새벽이 지나자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차로 보고서도 윤곽을 보이기 시작했다. 새벽 6시가 좀 못돼서 나는 드디어 막바지에 다다랐다. 자랑할 내용도 아니었고, 퀄리티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형편없을 게 정말 뻔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시작한 일을 잘 끝맺음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이는 열이 아예 없어지고 새근새근 편안한 얼굴로 숙면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참 다행인 일이었다.


급하게 기안을 올리고 보고서를 인편으로 제출하느라 일찍 학교를 나서기 위해 차 시동을 켠다. 이상하게 마음이 바쁘다. 어서 이것을 내 손에서 떠내 보내고 싶은 마음에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그때, 쿵-. 뒤에서 오던 차와 차선 변경을 하다 사고가 나고 말았다.


다친 사람은 없지만, 운전자분의 가족은 택시까지 타고 오셔서 나에게 고성을 지르고, 나는 나대로 보험사를 기다리느라 지치고. 마감시간이 지나 보고서 제출이 안되면 어쩌지부터, 급하게 일을 '마무리'만 하려고 한 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나는 절망과 공포가 가득한 얼굴로 상대방 운전자에게 "... 많이 놀라셨겠습니다."라고 연발했다. 상대방 운전자는 광분하는 남편을 잠재우고 나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보험 처리하면 되죠.라고 말했다.


각기 차에서 보험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차에서 내려 잠시 길에 걸 터 앉았다. 어느새 가을의 단풍이 완연해지고 있다. 언제 푸르고 푸른 여름이 지났는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시간들이 내 앞에서 멀어지고 나 혼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양새다. 나는 실소가 터졌다.


'이 모든 것이 뭐가 중한디.'

그렇다. 나는 어쩌면 조바심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감. 무언가를 놓치고는 있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 빨리 성과를 내고 싶은 초조함. 그 모든 것이 이 한 번의 차량 사고로 정지된 느낌.


".... 아. 고객님. **손해보험 ***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30분을 기다린 끝에 보험사 직원이 든든한 얼굴로 내 앞에 섰다. 나는 상대방 보험사를 또 30분을 기다렸다. 교육청 직원분들의 퇴근시간이 다가 오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못 내면 그만이지 뭐. 란 생각도 들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일을 다 마무리 짓고(자꾸 마무리란 단어를 쓰게 된다. 하하하.) 무사히 보고서를 제출했다. 돌아서 나오는 데 기분이 이상하다. 가방에는 아침에 먹다 남은 '찰리 브라운 토스트'가 지퍼백에 담겨 있다. 나는 지퍼백을 들고는 먹다 만 토스트의 모양새를 살펴보다 그냥 가방에 집어넣고 만다.


"그래. 마무리를 짓는다고 조급해지면 속는 거야. 그건 진정한 끝맺음이 아니지."


아무렴 어떠냐. 보험이 할증되겠지만 다친 사람은 없고 차가 서로 약간 긁힌 것에서 끝났다. 보고서는 내 손에서 멀어졌고, 아이의 열도 떨어졌다. 정말 괴로웠던 한 달이 잘 지나갔고, 여름도 끝이 났다. 이 낙엽도 언젠간 지고 앙상한 겨울나무와 차가운 골바람이 나를 맞을 것이다.


"... 그래 지나가는 건 나지. 세월이 아니고."

나는 다시금 예전부터 했던 생각을 주워 올린다. 끝을 맺는다는 생각. 그건 내가 하는 것이지 큰 관점에서 보면, 나도 계절처럼 지나가는 추억에 다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잡아야 할 것은. 오히려 천천히 순간을 즐겨야 하는 것일지도.


시동을 켜며 나는 백미러와 사이드미러 각도를 단단히 조정하고, 핸들을 꽉 잡았다. 운전 자랑은 하는 게 아니고 아무리 조심해도 모자란다! 나는 도로에 질주하는 차의 움직임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감사함. 현재에의 집중. 호흡.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나를 기다릴 아이의 얼굴. 차를 세우고 잠시 내리기 전 심호흡을 한다. 아이고 데이고. 신선 같은 생각을 하며 왔지만 육아로 스위치를 바꾸는 건 정말이지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나는 아랫배에 기합을 넣고 차 문을 닫고 나를 기다릴 아이에게로 향한다.



#워킹맘 #에세이 #공감 #글쓰기 #출퇴근 #접촉사고 #육아 #엄마



매거진의 이전글 출퇴근 여행 일기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