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떠오르는 이름.
그 해 대구에선 삼월에 오백 원짜리 만한 눈송이가 숭덩숭덩 내렸다.
흰 카디건 교복을 입은 채로 아이들은 교실 창문에 달라붙어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눈송이들은 막 핀 개나리 잎 위로 거짓말처럼 내려앉았다.
모든 것은 그 해의 고3 생활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은혜도 그 눈송이를 보았을 것이다.
우린 하루종일 그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얼굴도 키도 조약돌같이 작은 익살맞은 아이.
나와 그리 친하지도 않았지만 서로 모르지도 않았던 그 아이.
교복치마에 항상 체육복 바지를 입고 다녔던 아이.
은혜와는 항상 시답지만 우스운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사회가? 정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킬킬킬."
졸업을 하고 대학교 1학년이 되어 친구들을 만났을 때 누군가가 그랬다. 은혜는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고.
나는 은혜의 해사한 웃음소리와 조막만 한 얼굴이 입고 있던 흰 카디건보다 더 희였던.
치마 밑의 체육복 바지를 떠올렸다.
"졸업하고 바로 병원 입원했대. 백혈병. 대학은 못 갔대."
나는 그 해 3월의 개나리와 눈을 떠올렸다.
우리 같이 그걸 봤잖아.
같이 그 시절을 견뎌냈잖아.
그런데 너의 시간은 거기에서 멈추어 버렸다고?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이십 년이 더 지난 지금.
나는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끔 햇살이 너무 좋아 세상이 거짓말처럼 뚜렷하게 다가올 때.
푸르른 숲을 볼 때.
뜬금없이.
이유 없이.
나는 그 시절의 체육복바지를 교복치마 아래에 입고 해사하게 웃는
나와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그 아이.
은혜가 또렷하게 생각난다.
그 해 3월의 눈송이들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