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양육자는 양립할 수 있을까?
내 배가 정말로 남산만했을 때였다. 나는 결혼 7년 차였고 출산 예정일을 한 달정도 앞두고 있었다. 아이를 둘이나 낳은 멋진 커리어우먼인 동기가 나에게 말했다. “이제 니 인생에서 방학은 끝났어.” 나는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그녀가 한 말을 전적으로 이해한다.
엄마라는 컨셉 앞 뒤에 쓰인 신화는 우리의 자아를 밀어버린다. 그것은 모아이 석상처럼 단단하고 너무나 견고하게 이 지구상에 뿌리내려 있어 우리는 그 그림자에서 머무르며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네를 탄 것처럼 모성과 나 사이를 반복한다. 사람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네의 움직임 자체는 우리가 의도했던 아니던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전적으로 구조적이다. 누군가는 엄마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인생에서 떼어 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통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클레이 데더러는 자신의 저서 ‘괴물들’에서 양육자이면서 예술가로 양립하고자 하는 선택을 ‘타협(compromise)’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논쟁이 있을 수 있겠으나, 나는 그 말이 일부분 맞다고 생각한다. 선녀의 옷을 숨긴 것은 나무꾼이지만 그녀를 정말 주저앉힌 것은 임신과 출산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일정 기간 타협했다.
내가 창작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평온하게 주어진 삶의 길을 잘 달려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창작과 예술에 대한 열망과 불꽃을 느낀 양육자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신만의 방에서 몇발짝 나아가지 못한 삶의 현실을 씁쓸하고 달달하게 쳐다본다. 그렇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달고도 쓰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모두 엄마이기 이전의 삶을 잊을 수 없다. 오직 나 자신이었던 그 경험을 말이다. 나는 수시로 분열하고 쪼개진다. 슬프게도 우리는 나 자신이고자 할수록 씁쓸해진다. 죄책감은 보너스다.
클레이 데더러에 따르면 남편의 ‘협조’ 정도에 따라, 혹은 경제적으로 얼마만큼의 여유가 있느냐에 따라, 즉 ‘운’에 따라 양육자이며 예술가인 여성들의 삶의 그네의 흔들림은 정도를 달리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 어쨌든 흔들린다. 그 움직임 안에서 우리는 매번 포기하다 깨어진 조각을 이어 붙여 자신을 찾는다. 그러고는 다시 사라진다.
올리버 메이는 세가지 자아에 관해 설명한다. 어린이인 나, 세상의 시간에 따르는 규칙적이고 사회적인 나 그리고 마지막은 예술가로서의 나. 그녀는 예술가는 영원성에 대한 갈망 아래 ‘시간의 영역’과 ‘습관의 속박’을 넘어서는 작업의 힘을 따른다고 한다. 그렇기에 예술가는 비범한 에너지와 집중력 없이 작업을 시작할 수 없고 시작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올리버 메이는 자신에게는 평범하거나 시간을 맞춰야 할 책임이 없다고 단언한다. 잃어버린 단추나 냄비 안의 콩에 대한 책임도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영감이 다가오면 그것에 충실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녀의 전기를 찾아보았다. 역시나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도 없다.)
그렇다면 양육도 예술도 포기할 수 없는 욕심 많은 타협가인 나는 도대체 어떻게 분열한 나 자신을 수습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예술이라는 미지의 섬은 나에게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일까. 허락되지 않은 구역일까. 나에 대해 타협했듯이 내가 쓰는 글의 가치도 타협의 대상일까. 수많은 질문들이 나를 에워싼다.
올리버 메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가가 지적하듯이 작품을 만드는 초반에는 어떤 종류의 규칙성이 필요하다. 영감이 올 때만을 기다리는 것은 마스터에게나 해당하는 자세일 것이다. 양육자이자 예술가로서의 내가 글을 써내기 위해서는 제한된 시간 하에 빨리 고도의 집중력으로 영원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세가 절실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의 집중력, 시간과 돈을 뺏어 갈 만한 재미난 구석들이 많다. 다행히 우리에게 그런 것들은 이미 사치일 때가 많다. 나는 짬이 나는 시간에 바로 작업에 뛰어들려고 노력한다. 질이 좋지 않더라도 방해를 받더라도 그 집중이 산산이 구멍 난 것이라도 이어 붙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고독한 작업에 대한 열망을 심어 주긴 하나보다. 발 아래 불타는 양탄자를 깔고 우리는 혹은 댐 둑이 내 등 뒤에서 터지는 기분을 느끼며 달려 나가는 순간들. 그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위안이지 않을까.
가끔은 구름을 아래가 아닌 위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구름 아래로 내리는 비가 아니라 그 위로 치는 천둥을 봐야 한다. 중력보다 더 무겁게 여성에게만 작용하는 그 힘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내 피에 드리워진 뜨겁고 진하고 무서운 힘. 그리고 나의 안팎에서 나를 감싼 ‘엄마’라는 역할에 균열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사이를 죄책감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채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구조적’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의 무게는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 무언가를 꿈꾸고 열망하는 당신에게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철저하게 고독하게 침잠할 수 있고 바로 내가 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유한하고 공평하게 분배되는 자산이 우리에겐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분개해야 한다. 내가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것. 그것이 순간뿐일지라도. 미안해하지 않고,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아도 되도록 단단히 마음먹고 싶다.